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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남자의 사랑법

싱겁기 짝이 없는,『베로나의 두 신사』

by 램즈이어 Mar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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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의 두 신사』주인공 발렌틴은 연애하는 친구 프로테우스를 한심해하며 견문을 넓히려 넓은 세상으로 떠난다. 하지만 자신도 곧장 그곳에서 공작의 딸 실비아에게 반해 버린다.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 사랑은 으레 그래야 하니 - 대사를 호응하며 좇다가 우리 집 사람들의 연애풍경이 떠올랐다. 이런 알록달록함과는 거리가 먼 차분하고 단조로운 스타일의. 오히려 셰익스피어가 흑백에서 칼러 TV로 넘어온 것처럼 발랄하다.


발렌틴: 아니, 넌 내가 사랑에 빠진 걸 어떻게 알아?

스피드(발렌틴의 하인): 원 참, 이런 특징으로요. 첫째 당신은 붉은가슴울새처럼 사랑 노래를 즐기고, 역병에 걸린 사람처럼 혼자 걸으며, ABC를 잊어버린 학생처럼 한숨 쉬고, 할머니를 묻고 난 계집아이처럼 울며, 식이요법 하는 사람처럼 굶고, 도둑맞을까 봐 겁내는 사람처럼 깨어 있으며, 만성절 연회 맞은 거지처럼 애처롭게 말하세요. 보통 때는 웃는 게 수탉의 꼬끼오 같았고, 걸음은 사자들 가운데 한 마리 같았으며, 심각해 보일 때는 돈이 없어서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은 --- (2막 1장 15-25)  

   

발렌틴: 사랑은 종이 된 내 눈에서 잠을 쫓고 가슴속의 슬픔을 지켜보게 만들었어. , 프로테우스, 사랑은 막강한 군주로서 나를 정말 제압하여 그의 벌에 비견할 비통함은 없으며, 그를 위한 봉사에 비견할 희열은 이 지상에 없다고 고백하네.  (2막 4장 130-136)    

 

#1 남편은 대학 때 같은 동아리에서 만난 착하고 성실하고 가난해 보이는 후배였다. 후배가 선배에게 깍듯해야 했던 전통대로 늘 내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평소 존경심(?) 담긴 듯한 호의를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태도가 달라져서 나를 못 본체 했다. 슬슬 먼 곳을 맴돌고 가까이 오지 않으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떠도나? 한참 고민했던 것 같다. 나중에 엉뚱한 소식을 들을 때까지. (내게 어떤 마음을 품은 후로 오히려 가까이 올 수 없었다고 한다.)

 약혼 비슷한 기간에도 남편에게 연애편지다운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다. 군대에 있을 때 무슨 편지를 받기는 했는데 근황과 앞날의 계획만 담긴 전형적인 TJ 형 글이었다. 매일 쓰는 내게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 정도 답이 오며. 이일로 많이 다퉜고 결국 내가 제풀에 포기했다. (편지 개수의 불공평을 참아냄)


#2 처음으로 의미 있는 데이트를 하고 온 아들과 식탁에서 단 둘이 저녁을 먹을 때였다. 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던 아들이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상해. 참 이상하다.”

“뭐가?”

“뭔가 낯설어요.”

“뭐어?”

“뭔가 달라요. 엄마가 왜 이리 낯설지?”

“…. 하루 종일 젊은 아가씨를 보고 와서 늙은 얼굴이 낯선가 보네.”

  아들의 엉뚱함에 대충 답했지만 나도 그 질문이 낯설어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설거지를 마칠 때쯤 한 가지 예감에 이르렀다. 더 이상 아들의 삶에서 이전과 같은 엄마 역할을 할 수 없으리라는.

‘나는 이제 제2의 여인으로 밀렸군.’

 아들들은 세세한 이야기를 엄마와 나누지 않으니 사실 연애 양상을 잘 알지 못한다. 애타는 마음이 담긴 시(詩) 같은 문구들이 전해졌는지 아닌지. 아버지보다는 나았을 거라는 짐작 외에는.

    

 #3 형님의 자랑 큰집 조카는 스카이 명문대를 졸업하고 전문직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영예로운 아들에 걸맞은 훌륭한 며느리를 얻으려고 형님은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내게도 좋은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 청을 해서 까다로운 조건들을 고려하여 후보를 전달했다. 그런데 막상 조카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만나지조차 않았다.

 비슷한 일이 몇 번 되풀이되고 형님은 비로소 내게 고민을 토로했다. 사실 조카가 오랫동안 사귀어 온 아가씨가 있는데 자신이 영 맘에 흡족하지 않아서 신붓감 후보에 넣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세요. 그 애를 정말 사랑하는지? 만일 그렇다면 형님이 물러서야 하닌까요."

"그럴까?"      

 형님은 마침내 그 여친에 대하여 아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눈 모양이다. 담 주에 만났을 때.     

"많이 사랑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네. 그냥 그 아이랑 있으면 맘이 편하대. 어떡하지?"

"그거. 저희 애도 하던 말이에요. 맘이 편하다는 것은 못 헤어진다는 뜻 아닐까요?"      

 그 후 노총각이었던 조카의 혼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임(林)씨 남자들에게 사랑이 자리 잡을 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마음이 편하다'였던 것 같다. 남편과 아들, 조카의 데이트 시절을 소환해 보면 현재 진행형의 사랑을 할 때조차 그 표현들이 밋밋하기 짝이 없다. 문학작품 속의 절절함까지는 아니더라도 도통 재미라곤 없는. (아들과 조카의 경우, 내게 비취는 모습만 그렇고 당사자간에는 출렁이는 뭔가를 교환했을 수도 있겠다.)


  셰익스피어의 문장들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마저 마저 하고 맞장구를 치게 만드는 통찰이든, 현실 세계와는 한없이 동떨어진 뻥이든, 천재적 유머 감각을 보이는 익살이든 간에.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반가운 것은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의 독백이다. 희귀하고 예쁜 조약돌 만난 듯 애지중지하며 밑줄을 긋는다. 거장(巨匠)의 사랑에 대한 분석과 그 절묘한 스케치에 감탄하는 마음은 십 대 때나 할머니 문학소녀가 된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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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전집 2권『희극 II: 베로나의 두 신사』최종철 옮김, 민음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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