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참 설레었다. 기쁘고, 괜히 웃음이 새어 나오고, 아픈 것도 힘든 것도 다 사라지는 그런 마법 같은 일이었다. 하루를 버티게 해주고, 내일이 기다려지는 그런 멋진 위로였다. 그 행복을 그 위로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내가 받은 그 행복과 위로를 배로 더해 그 사람한테도 전해주고 싶었다.
"야 너 또 걔보러 갔다 온 거야?"
"..응..ㅎㅎ"
"참, 너도 진짜 지극정성이다."
"야~ 뭐가 지극정성이냐? 3층까지 얼마나 걸린다구~"
"너 쉬는 시간을 고대로 다 걔한테 쏟고 있잖아. 우리 같은 학생한테 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1분 1초인데..!"
"ㅎㅎ 그런가..?"
"너 점심시간에도 야자 시간에도 어? 그냥 틈만 나면 3층 올라갔다오고, 걔네 반 체육이라도 하는 날이면 나랑 자리 바꿔달라고 졸라서 2시간 내내 창문만 보고 있잖아!"
"야.. 왜 그래.. 화났어..?"
"아니. 네가 수업 시간에 지각하고, 딴 생각 하다가 선생님한테 찍히는 건데, 내가 왜 화나냐?"
"야아~~"
"으이구, 이것아 정신 차려라..!"
"어유~ 애들아 얘 너네 보러 가는 거 아니야~ 힘들게 3층까지 올라온다고 고마워할 게 아니라고오~"
"야야~ 겸사 겸사지~"
"아니 그리고, 너 말은 걸어봤냐?"
"..."
"아니 쳐다보기만 하면 뭐해? 걔가 너 이름은 아니? 아니, 걔가 너 얼굴은 아니?"
"야.. 왜 그래.. 아프다.."
"너는 더 아파야 돼. 어? 뭐 하는 거냐고! 공부도 안 해~ 좋아하는 사람한테 존재감도 못 드러내~"
"야! 그게 쉬운 줄 아냐? 나도 답답하다고오..”
"와.. 진짜.. 누굴 좋아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아니.. 이렇게 시끄러운 애가, 이렇게 소심해진다고..?"
"..ㅋㅋ 나도 내가 웃기다.."
친구는 평소에 긴장도 잘 안 하고, 이렇게 활발한 아이가 왜 그렇게 그 애 앞에만 서면 쭈그리가 되는지 의문이라고 했지만 그 점은 나도 의문이었기 때문에 답하기가 어려웠다. 먼저 다가가는 게 제일 쉬웠던 나는, 그 누구와도 바로 친구가 되었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며 살아왔는데 말이다.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온통 그 아이로 가득 차게 흘러갔다. 그 아이가 웃을 때면 나도 따라 웃게 되고, 그 아이가 찡그릴 때면 나도 따라 찡그리며. 다른 친구들을 핑계 삼아 그 아이의 반에 가서 그 아이를 보게 될 때면, 나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의 시선은 온통 그 아이를 비추고 있었다.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다 마주치거나 교무실에서 마주치게 되는 날엔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 아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 아이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그 아이에게 있어서 내 마음이 방해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야~ 알바하냐~~?"
"그래~ 알바한다~"
"돈 많이 벌어서 뭐 하려고?"
"ㅋㅋㅋ 그냥 닥치는 대로 막 벌라 그런다!"
"ㅋㅋㅋㅋㅋㅋㅋ 조만간 간다~"
"야 고만 좀 와라. 학교 다니는 내내 붙어있었음 됐지. 뭘 또 방학 때까지 만나냐?"
"야 학교랑 밖이랑은 다르지~ 야 너 되게 정 없다?"
"ㅋㅋㅋ 너무 서운해하시지 마시구요~"
"이미 상처 쫌 받았거든?"
"아이 진짜 ㅋㅋ 야 끊어. 이제 쉬는 시간 끝이다. 언제 올지나 미리 말해줘~ 네가 좋아하는 자몽에이드 만들어 놓고 딱 기다릴게."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어느새 더 커져서 세상을 촘촘히 메우며 쏟아지고 있었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하면서도 집에 걸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아.. 우산 가져올걸.."
"미소님 우산 안 가져오셨어요?"
"아.. 네 ㅠㅠ"
"그칠 것 같은 눈이 아닌데.. 매장에 남는 우산 있나 찾아봐 드릴게요."
"앗..! 감사합니다."
"음.. 오늘은 문을 일찍 닫을까?"
"아.. 그러는 게 낫겠어요."
"눈이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짤랑'
날씨가 좋지 않자 카페에 오는 손님이 없어서 일찍 문을 닫아야 하나, 사장님과 동료와 함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목도리를 둘둘 두르고 눈만 빼꼼 나온 채로 걸어왔지만 난 한눈에 알아봤다.
"따뜻한 카페라테 하나 주세요."
"..."
"저기요..?"
"아..! 아넵.. 뭐.. 뭐 달라고 하셨죠?"
"따뜻한 카페라테 하나요."
"아 넵.. 라테..!"
그 아이였다. 심장이 너무 뛰었다.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얼굴을 볼 수는 있었지만 말을 건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애 앞에만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은 물론이었고, 더군다나 괜히 나서서 말을 걸었다가 주변에 있는 애들이 주의를 기울이기라도 한다면 어후.. 안 봐도 시끄러워질 것이 뻔했다. 방학이 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는데도 방학 내내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것이 괜스레 우울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다니..! 당황스러움도 잠시, 기쁜 마음이 더 컸다.
'지이잉'
진동벨이 울리자 음료를 받으러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 아이스 라테.. 아니 따.. 따뜻한 라테 나왔습니다.."
"여기서 일해?"
"어?"
"앞치마 메고 있길래."
그 아이가 손으로 내가 입고 있는 앞치마를 가리켰다.
"아~ 어.. 어..! 여기서 일해!"
"여기는 몇 시까지 해?"
"아.. 10시까지! 이제 한 시간 정도 남았어."
"아.. 그렇구나. 음료 고마워."
갑자기 걸어온 대화에 숨이 막혔다.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생긴 호흡곤란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전에 나를 아는 사람인 것처럼 말을 거는 그 아이의 모습에 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짧은 대화를 곱씹으면서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기 위해 두 뺨을 때렸다.
"어머! 미소님 뭐해요?"
"네?! 아.. 아니! 추워서요! 추워서! 하하.."
'민망해라.. 하필 이 타이밍에..!'
"미소님 추위 많이 타시나 봐요.. 히터 좀 다시 틀어줄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까 저기, 목말라서 찬물을 좀 마셨더니.. 그래서 그래요..! 아.. 그건 그렇고, 우산은요..?!"
"아.. 미소님 어쩌죠.. 남는 우산이 없대요.. 집도 저랑 반대편 이어가지고.."
"어? 미소 씨 우산 없어? 내 거 줄까?"
"아! 괜찮아요! 사장님도 오늘 걸어가셔야 할 텐데. 사장님 집 멀잖아요~ 저는 집이 그렇게까지 멀지 않아서요~ 그냥 가도 됩니당~"
"진짜 괜찮겠어요?"
"아이~ 그럼요~ 여기서 20분 밖에 안 걸려요 ㅎㅎ"
평소에는 퇴근시간만을 기다렸지만 오늘은 퇴근시간이 되도록이면 천천히 오길 바랐다. 마감을 하면서도 내 신경은 온통 그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였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거 여기에 두면 돼? 버리는 곳이 막혀 있길래."
"아.. 어! 이쪽에 놓으면 돼!"
'잘 마셨어.'라고 말을 하고 뒤돌아선 그 아이는 어째서인지 다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애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게 확 뒤돌아선 그 모습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너 10시에 딱 끝나?"
"어.. 빠르면 9시 50분 정도에도 끝나."
"나 그럼 여기에 앉아서 좀 기다릴게."
"응?"
"너 우산 없다며."
"어.."
"데려다줄게. 눈 너무 많이 와서 이대로 가면 너 눈사람 돼."
"아.. 아..ㅋㅋ.. 아.. 큼.. 어. 알겠어."
눈사람 된다는 그 아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곧바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데려다준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기쁨과 의아함과 설렘과 당황스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오! 미소 씨 친구야?"
"아.. 네.. 넵!"
"그럼 얼른 들어가 봐~ 데려다준다니 정말 다행이다!"
"마자요! 미소님 얼릉 들어가요. 마무리는 저랑 사장님이 할게요!"
"아.. 그래도.."
"아휴~ 얼른! 앞치마 이리 줘요!"
"잘 가요~ 다음 주에 봐요~"
동료와 사장님의 큰 배려로 조금 일찍 퇴근을 하게 되었다. 원래도 정말 좋은 동료와 사장님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