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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아 Jul 10. 2024

미소의 이야기 (2)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아.


행복은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다. 예상치 못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더 기쁘고, 들뜬다. 짝사랑은 행복하다. 그리고 괴롭다. 그렇지만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긴 괴로움보다 짧게 건드리고 가는 설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가까워지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다. 얘기를 하고, 함께 웃는 모습을 그릴 때면 참 소박한 상상이다 싶으면서도 그 소박한 마음이 날 즐겁게 만들어주었기에,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여린 보석이었다.




우리는 작은 우산을 나눠쓰고 걸었다. 다행히도 집이 같은 방향이었다. 원래라면 20분 정도 걸릴 거리였지만 눈 때문에 40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1시간 아니 2시간 아니.. 그 이상으로 걸려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얜.. 나를 알고 있는 걸까? 설마 모르는데, 데려다준다고 했겠어? 아니, 그치만 학교에서 말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치만 나한테 말을 거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들뜬 마음이 살짝 진정이 되자, 잠시 묻어두었던 물음들이 막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 나 알아?', '나 너 안다?', '오랜만이네?', '방학 잘 보냈어?' 등등.. 어떻게 질문을 던져야 자연스러울까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제일 괜찮은 질문을 골랐다.


“나..! 너랑 같은 학교인데.. ㅎ”

“알아.”

“아..? 아..! 그.. 그렇겠지.. ㅎ 그러니까 이.. 이렇게.. 대화도 하고 데려다주기도 하고.. 그러는 건데, 하하..”


'뭔 소리 하는 거야.. 진짜 ㅠㅠ'

이렇게 버벅거리면서 말을 하는 내가 참 웃기면서도 한심스러웠다.


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짧게 답하곤, 어딘가 풀이 죽어 있는 듯한 나를 느낀 것인지, 나를 쳐다보며 이유를 붙여주었다.


“너 우리 반 자주 왔잖아.”

“아..!”


순간 창피함이 몰려왔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3층으로 달려갔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 어! 친구가! 친구들이 있거든..!"

"매번 3층까지 올라왔던 거 보면 되게 친한 사이인가 보다."

"어..! 엄청! ㅎㅎ..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이거든!"

"그렇구나."


".. 나는 네가 나를 알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처음에는 못 알아봤는데, 목소리 들으니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다 했거든."

"아.. 그래? 하하.. 내가 좀 시끄럽지? 참.."

"응."

"응..?"

"아니, 농담이야."

"아..! 아 뭐야.. ㅎㅎ"

"솔직히 처음엔 시끄럽긴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까 저렇게 밝은 애도 있구나 싶더라고."

"아.. 하하하! 고마워."


'밝은 애..'

그 아이의 말에 심장이 요동쳤다. 그 아이에게 있어서 밝은 사람으로 보였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눈 진짜 많이 온다..!"

"그러게, 겨울도 끝나가는데."

"눈 오는 날 좋아해..?"

"아니."

"왜?"

"그냥.. 뭐.."

".. 나는 좋아해.. 눈 오는 날.. 그리고 비 오는 날도."


밤이 깊어갈수록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거리 위로 우리의 발자국을 새겨 넣었다. 뚜렷한 발자국만큼이나 오늘은 내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될 것이다. 쌓여가는 눈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 착각이었을 테지만 어느 겨울날보다도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 아이는 내게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내가 묻는 말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 애가 내게 질문을 할 틈도 없이 내가 먼저 질문을 했기 때문에 그 아이가 먼저 말할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끔 엉뚱한 질문을 던질 땐 아차 싶은 마음에 내 입을 때리고 싶기도 했는데, 그 아이가 살짝 웃을 때면 나타나는 그 보조개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창피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저.. 저기!"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아, 가는 길이었는데 뭐."

"그래도..!"

"그래."


"학교에서 보면 아는 척해도 돼..?"

"음.. 아니."

"어..?"

"ㅋㅋ 장난이야."

"아..ㅎㅎ 진짜."


"저.. 그럼 혹시.. 번.. 번호 알려줄 수 있어..?"


아무 말 없이 내게 내민 손에 살며시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하하- 손에 입김을 두어 번 불고 나서 툭툭 번호를 치고,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그 아이가 적어 준 번호를 눌러서 내 번호를 알려줄 때, 그 아이의 핸드폰이 강하게 진동으로 울릴 때, 마치 지금 떨리고 있는 내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것만 같았다.


빨개진 그 아이의 오른손이 선명하다. 나에게 살짝 기울어져 있던 우산이 느껴진다. 생각보다 더 큰 키에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던 나의 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걸어주던 발걸음을 곱씹는다.

모든 게 그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싶었다. 혼자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마음을 조금씩 표현하고 싶었다.


참,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거의 1년간을 아무 말도 못 하고, 혼자 설레하고 혼자 시무룩해하고 그렇게 보냈던 것 같은데.. 가끔은 이렇게 짝사랑하는 게 맞는 건가? 혹시나 내 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 아이가 싫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의기소침해진 적도 많았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이대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홧김에 고백해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 아이의 기억 속에 진짜 이상한 아이로 찍힐까 봐 이마를 치며 바로 정신을 차리기도 했었다.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그래도.. 가까워지는 게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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