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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과 이민

급할 땐 간절하고, 끝나면 까다롭다

by K 엔젤

새해가 밝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2월이다. 학교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간다. 일하랴, 학교 다니랴, 구직 준비에 이력서 쓰고 인터뷰 연습하고, 영어시험까지 챙기다 보면 머릿속이 늘 복잡하다. 요즘은 거기에 영주권 신청 절차까지 공부하느라 하루가 모자라다.


졸업 후 영주권을 받으려면 어디서 일하는 게 유리할까, 그 계산을 하는 것도 은근 재미있다. 내 프로그램은 2년짜리라서 4월에 학교가 끝나면 180일 안에 PGWP(Post Graduate Work Permit)를 신청해야 한다. 워크퍼밋만 나오면 캐나다에서 일할 수 있는 3년이 생긴다.

보통은 빠르면 3~4주 만에 나온다. 그래서 나처럼 4월 졸업하는 유학생들은 1월부터 슬슬 구직을 시작한다. 운 좋은 사람들은 워크퍼밋 신청 중에도 일을 시작하지만, 대부분은 졸업 시즌에 맞춰 5월부터 본격적으로 일한다. 그 기간 동안 1년 경력을 쌓고, 영어 점수와 학력, 지역 점수, 시급, 직업군 점수까지 합산해서 영주권 포인트를 계산한다.

계산은 숫자 놀음 같지만, 사실은 내 미래를 어디에 걸어야 할지 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3년을 보낼지. 그게 곧 내가 이 나라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의 시작점이 되니까.


유학 후 이민 상담을 받으면 꼭 듣는 말이 있다.
“Xx 씨는 인터내셔널 학생 카테고리에 해당되세요.”

이 말이 참 웃기다. 마치 내 영주권이 이미 발급 대기 중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하지만 현실은 뭐다? 서류, 점수, 서류, 점수. 이민의 공식 언어는 영어도 불어도 아닌 숫자다.

나는 한국에서 요양보호사 기관에서 4개월 일했다. 그 시절 하루에 열두 번은 들었던 질문이 있다.
“밥 먹었어?”
밥을 물은 게 아니라 “너 아직 살아있니?” 하는 존재 확인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4개월이 내 이민 점수표에 ‘+4개월’로 찍힐 줄은.

캐나다에서는 노숙자 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1년. 주 30시간 이상, 1년에 1500시간 이상. 여기서 하루에 열두 번 들은 질문은 “담배 있어?”.
밥 대신 담배, 질문은 바뀌었지만 리듬은 똑같았다. 밥 먹었어? 담배 있어? 살아있냐는 방식만 달라졌을 뿐.

상담원은 내 얘기를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BC주는 전공 안 맞아도 경력 인정돼요. 사회복지도 헬스케어라서 1년 이상이면 경력 점수 10점 추가예요.”

순간 웃음이 났다.
내가 얼어붙은 손으로 사람 등을 두드리고, 중독자 손을 붙잡고, 밥과 담배 사이에서 보낸 그 1500시간이 숫자 ‘10’으로 환산되는 순간.

“밥 먹었어?” → 존재 확인
“담배 있어?” → 생존 확인
“점수 있어?” → 이민 확인

캐나다 이민은 결국 이렇게 단순하다. 단순해서 웃기고, 웃겨서 더 씁쓸하다. 아, 인생이 결국 스코어 게임이라면 최소한 하이 스코어는 찍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캐나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IT와 헬스케어 종사자를 우선으로 받는다.
엔지니어, 교수, 의사 같은 고학력 직군은 영어 점수도 낮게 요구하거나 아예 면제가 되기도 한다. “똑똑한데 영어까지 잘하면 반칙”이라는 캐나다식 배려일까.

내가 놀랐던 건, 지역 점수라는 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어디서 일했는지가 점수가 된다. 역시 이민자의 나라. “네가 뭘 했냐”보다 “네가 어디서 했냐”를 더 중시하는 시스템.

그리고 그 ‘어디’가 보통은 사람들이 줄 서는 대도시가 아니다. 외곽, 변두리, 사람들이 잘 안 가는 곳. 결국 캐나다의 이민 시스템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사람 없는 데 가서 버텨봐. 거기서 살아남으면 점수 줄게.”

웃긴 건, 나는 원래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걸 안 좋아한다. 그래서 이 제도가 오히려 마음 편하다. 굳이 빡빡한 도시에서 치이고 살 필요 없이, 좀 떨어진 곳에서 살면서 점수도 챙기고 평온함도 챙기는 것.

결국 이민 점수라는 것도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닐까.
“사람 없는 곳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보여줘. 그럼 우리가 너를 받아줄게.”


똥 누러 가기 전과 똥 누고 나온 후의 생각이 다르다더니,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말 같다.

캐나다 오기 전에는 “어디든 좋으니 제발 캐나다만 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캐나다에 와서는 학비를 벌어야 하니 “어떤 일이든 상관없으니 그냥 시켜만 달라”고 매니저한테 매달렸다.
물불 안 가리고, 자존심 따위는 한쪽 구석에 던져놓고, 그저 “일, 일, 일”을 외쳤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졸업 후 직장을 찾으면서 내가 살 지역을 따지고 있다.
“여기는 교통이 불편해서… 이쪽은 집값이… 여긴 아시아 마트가 없네…”
참 간사하다. 그 구질구질하던 모습은 언제 눈 녹듯 사라지고, 어느새 나는 조건을 고르고 있다.

아마 인간이란 다 이런 동물일 거다.
똥 누기 전엔 제발 빨리 화장실만, 똥 누고 나면 휴지가 두 겹이어야 하네 마네 따지는 그런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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