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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없어서 홈스쿨링

의식의 흐름으로 공부한 30년 만의 영어 시험

by K 엔젤


PGWP가 나오기 전에 영어시험을 보기로 했다.
캐나다 이민의 관문, CELPIP.

캐나다에서 살다 보면 이상한 순간에 ‘영어’가 현실의 무게로 다가온다.
처음 학교에 등록할 때도 아니고, 알바 면접을 볼 때도 아니다. 바로 영주권 앞에서다.
“영어 점수 없으면 넌 여기까지야.”
이민 시스템은 그렇게 담담하고도 확실하게 경계선을 긋는다.

나는 결국 CELPIP 시험을 등록했다. 시험비는 $280 + tax.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묘하게 심장이 뛰었다.
“아, 이건 영어 시험이 아니라 이민 자격 증명서네. 세금까지 붙은 운명 시험이다.”

CELPIP은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네 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지만 사실상 네 가지 방식으로 멘탈을 테스트하는 시험이다.
아이엘츠 대신 캐나다 영주권과 시민권 신청에 꼭 필요한 시험이기도 하다.

30년 인생 처음으로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시험 공부를 하기로 했다.
누가 보면 대담하다고 하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돈이 없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셀핍 팁 영상들을 찾아보며 첫 며칠은 시험 구조를 감만 잡았다.

공식 사이트의 무료 모의고사 두 개를 풀어본 뒤 깨달았다.
“아 이건 영어 실력보다 포맷 파악이 더 중요한 게임이구나.”

시험 공부를 하면서 이상한 감정이 스쳤다.
이건 단순한 영어 시험이 아니라, 내가 이 나라에서 ‘살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첫 번째 관문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아, 이제부터는 영어 한 단어 한 단어에 내 이민 점수가 붙는구나.”

공부 계획? 웃기지 마라

내 계획은 늘 아침에만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리스닝.
CELPIP 리스닝은 노트테이킹만 잘하면 점수 올리기 쉽다길래, 부담 없이 몇 세트 풀고는 “이 정도면 오늘은 충분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넘어갔다.

오후엔 리딩 세트.
두 세트 풀고 나면 “아 오늘 진짜 열심히 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스피킹 연습.
이쯤 되면 공부라기보다 체력전. ‘양으로 밀어붙이는 게 전략이겠지?’라는 이상한 합리화도 생겼다.

공부를 꼼꼼히 하기보다는 그냥 무식하게 많이.
집에서 시험장 분위기 흉내 내고 시간 재면서 문제를 풀다 보니 이상하게 자신감이 붙었다.
유튜브에 모의고사처럼 풀 수 있는 영상도 많아서 그걸 보면서 연습.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이 정도면 다 준비된 거 아니야?”

물론, 준비된 건 자신감이지 실력은 아니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다들 똑같이 말한다.
“이미 아는 건 놔두고 부족한 걸 파고들어야 한다. 거길 보완해야 점수가 나온다.”

네, 머리로는 알지만 근데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부분부터 했다.

CELPIP 리딩은 지문 자체는 쉽다. 아이엘츠보다 짧고 부담도 덜하다. 하지만 문제는 은근히 까다롭다. 특히 고득점을 원한다면 파트 1, 2는 다 맞아야 한다. 38문제 전부 객관식이라 ‘운빨 게임’ 같지만, 엄연한 시험이라 문제 푸는 스킬이 있어야 점수가 나온다.

그런데 나는 틀린 문제를 봐도 이렇게 생각했다.
“에이~ 이건 집중을 덜 해서 그렇지. 시험장 가면 맞겠지 뭐~”

오답노트? 분석? 그런 거 귀찮아서 안 했다.
문제를 풀었다는 사실 자체에 뿌듯해하며 “오늘도 공부했다!”고 스스로 토닥토닥.
결국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공부했다.

시험 대비라기보다, 그냥 나와 CELPIP의 3주짜리 동거였다.


CELPIP 스피킹은 총 8개 파트로 나온다.

처음 목록을 봤을 때 든 생각은 단 하나.
“아 이건 영어 시험이라기보다 멘탈 테스트네.”


조언하기 – 졸업 앞둔 친구한테 뭘 하라고 할 거냐.
문제 읽는 순간, 내 머릿속은 비어 있었다. “야, 그냥 졸업부터 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영어고 뭐고 감점이다.


경험 말하기 – 잊지 못할 선물은?

갑자기 지난 30년의 생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데, 생각난 건 편의점 케이크였다. 인생이 이렇게 빈약해도 되나?


그림 묘사 – 공항, 공원, 가끔은 진짜 기괴한 그림.

현재진행형 동사 써야 해서 “People are... people are...”만 반복하다 끝난 적도 있다.


미래 예측 – will, going to 쓰는 문제.

내 미래는 안 보여도 문법은 지켜야 한다. 이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내 미래에 확신이 생겼다. “나는...will... fail...?”


세 가지 아이템 비교 후 친구 설득

문제보다 더 힘든 건, 영어로 친구가 있다는 가정 자체였다.


두 가지 상황 중 선택 후 직장/동료 설득

캐나다 직장 경험이 없는 나는 결국 상상의 동료를 만들어냈다. 이름은 밥이었다. 이유는 그냥 쉬워서.


주제에 대한 찬반 의견 – “학교에 스포츠 활동이 필요하냐?”

이민 때문에 운동할 시간도 없는데, 갑자기 체육의 중요성을 설득하는 나 자신이 웃겼다.


돌발 상황 – 기괴한 그림 보면서 친구에게 사라고 설득하기.
이건 영어 시험이 아니라 미친 연기력 오디션이었다. “This...uh... strange... but...useful?”



스피킹 공부를 시작하자, 10년 전 토플 시험장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입을 뗀 순간, 아니, 입을 못 뗀 순간.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나온 그 날의 공기까지 생생했다.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캐나다다. 여기는 내 영주권이 걸린 땅이다.”

이상한 자존심이 생겼다.
리딩은 못 나와도 스피킹 점수만큼은 잘 받고 싶었다.
“적어도 말은 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록되자.”

그래서 스피킹 예상 질문 10개를 뽑아서 연습을 시작했다.
졸업 앞둔 친구에게 조언하기, 잊지 못할 선물 말하기, 그림 묘사하기 등
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면서 느꼈다.
“이건 영어 연습이 아니라 멘탈 재활이다.”

CELPIP 스피킹은 준비를 해도 당일 어떤 문제가 나올지 모른다는 압박이 심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준비한 건 안 나온다.”

스피킹에서 중요한 건 다양하게 표현을 섞고, 이유를 붙이고, 시간 내에 말을 끝내는 것.

유튜브 영상은 하나같이 말했다.

“생각하지 마. 뭐라도 먼저 뱉어. 입을 여는 순간부터 점수가 올라간다.”

또 한 가지, 인사부터 하고 친구에게 말하듯 안정된 톤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중얼거렸다.
“Hi there! You know what? Actually... Well, let me tell you something...”
(영어라기보다는 그냥 발성 연습에 가까웠다.)

경험이나 조언 파트는 물어보는 내용이 비슷하길래, “가장 감명 깊었던 강의”와 “친구에게 추천할 여행지” 두 가지 답은 아예 외워갔다.
외운 대사라도 당황해서 말 꼬이면 그게 진짜 영어 실력 같다.

라이팅은 더 단순했다.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두 문제만 풀었다.
시험 문제는 딱 두 개, 150~200자 이내 타이핑.
단순하지만 그만큼 무섭다. 스피킹은 적어도 표정으로 점수를 얻을 수 있지만, 라이팅은 키보드 소리만 남는다. “내 손가락아, 오늘은 너에게 내 영주권을 맡긴다.”


CELPIP 라이팅 문제 예시는 이런 식이다.

회사에서 직원들을 다독이기 위해 기프트 카드를 주는 게 낫냐, 아니면 현금을 주는 게 낫냐. (25분)

식당에 갔는데 서비스가 별로였다. 매니저에게 항의 편지를 써라. (25분)


솔직히 이메일도 많이 쓰고, 말하는 내용을 글로 쓰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아서 “라이팅은 그냥 되겠지” 했다.
그래서 공부를 안 했다.

시험 보기 전, 공식 홈페이지에서 유료 모의고사 몇 회분을 사볼까 고민도 했다.
근데 사람들이 말했다.
“첫 시험은 그냥 봐. 점수 안 나오면 그때 사. 돈 아깝다.”

이민 준비라는 게 결국 시험도 장바구니에 넣고 계산하는 게임이다.
그래서 나는 유료 모의고사 대신 유튜브에서 리스닝 팁, 라이팅 팁을 긁어모았다.
“무료인데 왜 안 해?”라는 이상한 만족감과 함께.

280달러 + tax를 내고 시험을 등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40달러 아끼려고 유료 모의고사를 안 산 나.
캐나다 이민 준비는 이렇게 돈과 점수의 미묘한 줄다리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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