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른 일어나! 할아버지 돌아가셨대.”
2016년 8월의 여름방학이었다. 엄마가 느지막이 늦잠을 자고 있던 나와 동생을 다급히 깨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릴 적 몸이 아파 일찍 돌아가셨다. 나는 태어난 이후로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도, 함께한 기억도 없다. 그저 매년 치르는 집안 제사에서 영정 사진도 없는 상을 두고 꾸벅 인사드린 게 전부였다. 그렇다면 엄마가 지칭하는 할아버지는 친할아버지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친할아버지는 아빠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탁 트인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비릿한 바다 내음. 일렁이는 물결 따라 통통 움직이는 하얀 배들 사이에서 큰 문어를 잡아 드는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바닷가 근처에 터를 잡고, 부업으로 집 1층에서 작은 동네 슈퍼를 운영했다. 딸랑딸랑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면 가장 전면에 전시되어 있는 달콤한 과자와 아이스크림이 어린 두 남매를 맞이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와 동생은 가장 좋아하는 공룡알 모양의 초콜릿과 형형색색의 동그란 껌을 집고 나눠 먹곤 했다.
단내 나는 것만 골라 실컷 군것질을 하고 나면 쌀밥을 분해할 침샘은 감쪽같이 말라 버린다. 값비싼 해산물마저 입에 맞지 않는 어린 손주들의 숟가락질이 시원치 않자 할아버지는 곧바로 치킨을 주문했다. 할머니는 말랑한 손과 볼에 묻은 끈적끈적한 양념 소스와 바닥에 떨어진 튀김 부스러기를 닦고 또 닦았다.
하늘을 침대 삼아 누운 별들이 졸린 듯 눈을 깜빡이며 잘 시간이 됐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텔레비전은 없지만 넓은 2층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대 옆 작고 아늑한 1층 보금자리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나와 동생만이 남았다. 간간이 슈퍼에 들러 고사리 같은 손에 용돈을 쥐여 주던 이웃 손님들의 발길도 끊겼다. 그 흔한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적막에 서서히 정신이 몽롱해졌다. 두꺼운 솜이불을 깔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데일 것만 같은 뜨거운 온돌 탓에 땀을 뻘뻘 흘리며 방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토실토실하게 오른 배는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따스함만이 남았던 그날이, 온기로 기억하는 할아버지와의 유일한 추억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난 뒤에는 자연스레 강원도에 갈 일도 적어졌다. 아빠는 명절이 되면 혼자 차를 끌고 고향에 갔다. 더 이상 달콤한 군것질과 치킨을 찾는 손주들은 없었다. 큰아빠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종종 고모와 아빠가 돌아가면서 얼굴을 비췄다. 어느덧 휴대전화가 생긴 나는 친가의 안부를 아빠와의 전화로 전해 들을 뿐이었다.
최근 들어 할아버지의 기침이 멎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단순 감기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병원에서 폐에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꼼짝없이 누워 있게 된 할아버지는 중증 환자로 분리되어 면회도 쉽지 않았다. 아빠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병문안 약속을 잡아 보겠다고 말했다. 막연해서 막막했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이 기약조차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소식은 무한함의 덧없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할아버지는 폐에 물이 차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었고, 치료를 받던 도중 결국 생을 마감했다.
아빠는 먼저 강원도로 내려가서 상을 치르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아빠 친구가 지금 데리러 가고 있으니 같이 차를 타고 오면 된다고 했다. 전화 속 아빠는 생각보다 덤덤한 듯했다. 아빠의 입장을 나로 대입해 보면 목소리로 안부를 짐작할 수 있는 지금의 아빠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미 너무 많이 울어 눈물이 메마른 것일지도 모른다. 날 닮아 눈꼬리가 축 처진 아빠의 얼굴을 떠올리자 해일이 들이닥치듯 성대가 떨려 왔다. 금방이라도 파도가 방파제를 뚫고 몰아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아빠 앞에서 울 수 없었다. 목 끝까지 울컥 차오른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뗐다.
“아빠, 괜찮아?”
아빠는 괜찮다고 했다. 알았어. 이따 봐. 애써 의젓한 목소리로 금방 갈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아빠의 의연한 첫째 딸이 되어야 했으니까.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오감을 자극한 건 독한 향냄새도, 까슬까슬한 검은 상복도 아닌 극심한 할머니의 통곡 소리였다. 할머니는 나와 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연신 아이고를 외치며 꺼이꺼이 울었다. 나도 모르게 붉어지는 눈시울을 들킬세라 연신 손으로 눈을 비볐다.
2남 1녀 중 막내아들인 아빠는 얼떨결에 장남이 되었다. 미국에서 방금 막 출국한 큰 아빠를 대신해서 아빠가 상주 역할을 도맡았다. 그리고 아빠의 아들인 동생이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거처 주변을 돌았다. 할아버지의 딸인 고모와 아빠의 딸인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훗날 나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게 된 날을 상상했다. 당장에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가올 현실에 딸의 손으로 직접 영면의 길을 닦아 주고 말 것이라는 결의가 생겼다. 적어도 지금처럼 그저 손님을 맞이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뻐근해진 목이 거대한 암석처럼 굳어 가는 게 느껴질 때쯤 밖으로 나와 할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8월의 무더위를 흐린 하늘이 앗아간 것처럼 싸늘한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굵어지는 빗줄기의 낙하에 맞춰 할머니의 울음도 덩달아 거세졌다.
어느덧 8년이 지났다. 할머니는 요양원 침대에 누워 있다. 다리에 근육이 다 빠져 걸을 수 없다고 한다. 할머니는 면회 온 내 얼굴을 보자마자 또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으면 할머니는 빼먹지 않고 엄마 말 잘 들으라는 말을 한다. 할머니 눈에는 내가 여전히 엄마 곁에 있는 아이처럼 보이는 듯했다. 어른이 되려고 독립했어요, 할머니. 굳이 전하지 않을 말을 속으로 삼킨 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아빠 효도 좀 해야겠다.”
짧은 면회를 마친 뒤 엄마를 보러 갔다. 퉁명스럽지만 걱정 어린 엄마의 말에 안 그래도 아빠 혼자 간호하고 있다고, 고모는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할아버지 집이 아빠 명의로 되어 있다나 뭐라나. 반기를 든 고모는 할머니를 보지 않는 걸 택했고, 아빠는 그 집 필요 없으니 누나가 간병하라는 말로 응수했다고 했다. 고모는 아파트 두 채를 소유하고 있고, 아빠는 여전히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집이 없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솔직하고 용기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유산 상속은 뉴스에서나 들을 법한 먼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효라는 것이 돈으로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건 우리네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아빠는 전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재혼해서 생긴 이복형제였고, 할아버지의 핏줄은 아빠와 나, 동생뿐이었다. 그러니 엄마는 할아버지 집은 당연히 아빠 명의로 두는 게 맞다고 했다. 곧바로 나중에 그 집은 내가 물려받으면 된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언젠가 할머니마저 잃게 될 아빠에게 집 한 채만 덜렁 남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온기 없이 텅 빈 세상은 내 선에서 마땅히 박살 나고야 말 것이니까. 돈을 향한 탐욕이 부른 와해를 두 번 다시 겪지 않을 테니까.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한다. 아빠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어딘가 불안하고 슬퍼 보였던 게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빠가 나에게도 아픈 손가락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