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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현아 Jan 03. 2025

10여 년 만의 조우


 엄마, 큰아빠네 오빠가 미국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서 결혼했대. 기독교 집안인가 봐. 교회에서 식 올렸다고 하더라. 고모도 가서 축하해 주고 왔대. 물론 아빠는 못 갔고. 아빠는 여권도 없을걸? 그래 놓고 나중에 같이 미국 가자고 한다. 웃기지. 아, 할머니는 요즘 다리가 안 좋으셔서 요양원에 있어. 얼마 전에 병문안 다녀왔는데 나 보자마자 우시더라. 그러더니 엄마 말 잘 들으래. 내가 충분히 잘 듣고 있다고 했지. 나 같은 딸이 어디 있어, 엄마. 그치.


 아빠, 둘째 외숙네는 딸 부잣집이잖아. 언니들이 순차적으로 결혼해서 애도 벌써 몇 명씩 낳았어. 아, 그리고 첫째 외숙네 오빠는 호주로 이민 가서 잘 살고 있어. 나도 한번 놀러 갔다 왔는데 집도 엄청 넓고 좋더라. 호주는 땅이 커서 그런지 다들 차고지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더라고. 장난 아니지. 나는 한국에서 작은 단칸방도 못 살 처지라 문젠데. 그래도 나름 고모 노릇 한다고 조카한테 로보카폴리 장난감도 선물로 주고 왔어. 지금쯤이면 벌써 내 얼굴 까먹었을 수도 있겠다. 아빠는 도대체 여권 언제 만들래? 아, 엄마는 일 그만두고 쉬다가 최근에 다시 직장 구했어, 신도림 쪽으로. 처음으로 지하철 타고 다니니까 힘들어 죽겠대. 아빠도 지하철 타 본 적 거의 없지?



 엄마와 아빠는 거주지만 다를 뿐 여전히 같은 동네에서 산다. 동네 마트에서 10년 넘게 계산원으로 일한 엄마는 같이 길을 걷다 보면 동네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정도로 유명 인사지만 아빠와는 마주치기 힘들다. 우연한 만남이 성사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서로의 밑바닥까지 본 사이에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나조차도 아르바이트할 때 만난 악덕 사장이랑 털끝만큼도 마주치기 싫어서 가까운 길 놔두고 돌아가곤 하니까. 실제로 엄마는 우연히 아빠를 맞닥뜨린 골목에서 날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후다닥 빠져나갔고, 그런 엄마의 집은 아빠에게 출입 금지 팻말이 걸린 위험 지역과도 같았다. 그 경계에 있는 나는 엄마와 아빠의 안부를 전하는 정보통 역할을 자처하고 있으며, 엄마랑 아빠도 종종 각 집안 사람들의 소식을 묻곤 한다.


“아빠, 외할머니 돌아가셨대. 지금 장례식장이야.”


 2년 전, 외할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을 때 아빠가 부의금을 보내 주며 엄마한테 대신 전달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자신은 전 시아버지의 장례식 날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며 머쓱해하는 엄마에게 지난 일은 이미 지난 일이고, 그냥 부담 없이 받으라고 했다. 지천명을 넘긴 아빠가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차리는 못다 한 예의였을 것이다.

 장례를 마치고 엄마 집에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날, 김치와 각종 반찬을 담은 짐이 너무 무거워 아빠한테 도움을 청했다. 엄마는 차에 싣는 만큼 쌀도 같이 가져가라고 하더니 직접 들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서로 마주치게 될 텐데. 밖에는 이미 아빠가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를 향해 아빠가 이미 와 있다고 외쳤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0여 년 만의 조우는 어색하지도 감동스럽지도 않았다. 현장의 목격자인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흔들리는 아빠의 눈빛을 읽었다. 그 외에 느낀 것은 없었다. 1분간의 짧은 만남은 그대로 끝이 났다. 나는 엄마에게 손 인사를 건넨 뒤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자취방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아빠는 엄마에 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아빠는 북적북적한 가족의 느낌이 좋아 열 남매 중 아홉째인 엄마를 만났고, 엄마는 북적북적한 가족의 품을 벗어난 독립을 꿈꾸고 있을 때 아빠와 결혼했다. 어린 엄마와 아빠는 서로의 결핍을 채워 주고자 했지만 비로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남은 인생의 절반을 자신의 몫으로 돌린 두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인생은 풀릴 듯 말 듯 복잡하게 꼬여 있고, 매듭을 풀 수 있는 단 하나의 끈을 쥐고 있는 건 각자의 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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