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운기를 떠나보내며
“Embrace myself.”
‘성난 사람들(BEEF)’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난 뒤 떠오른 문구다. 영어로 감상평을 떠올리다니 이게 무슨 일이냐며 반가움 반 의구심 반으로 단어를 검색했다.
embrace: 껴안다, 수용하다, 아우르다
의미를 확인하고 보니 내가 영 엉뚱한 단어를 떠올린 건 아니었구나 했다. 드라마는 재미와 함께 철학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어 좋았다. “Embrace myself.” 드라마를 표현하는 내용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현재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 떠오른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요즘 무기력하다 싶을 만큼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얼마 전 리프레시를 위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사진 정리와 여행기를 쓰는 것도 뒤로 한채 별 달리 하는 것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왜 이렇게 귀찮고 피곤한지. 환절기라 그런가 싶다가도 무기력증이 생각보다 오래가는 것 같아 속으로 걱정하는 마음도 생긴다.
뭐, 덕분에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 시리즈를 몰아봤으니 나태함도 나름의 할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요새 직장에서 업무도 최대한 미뤄서 하고 있는 중이라 이 안일함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요새 나는 인터넷에 '교운기'를 검색해 보며 위로받고 있다.
사주에서 대운이 바뀌는 시기를 교운기라고 한다. 누구나 대운은 10년마다 바뀌고, 계절 대운은 30년마다 바뀐다. 사주에도 환절기가 있는 걸까? 특히 계절 대운이 바뀌는 교운기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나는 현재 계절 대운이 바뀌는 교운기의 시기인데, 최근 2~3년간 이직, 이사, 가치관의 변화 등 여러 가지 큰 변화가 많았다.
교운기 특징 중 번아웃이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나처럼 교운기에 의욕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좋은 운으로 바뀌기 직전에 더 그렇다는 말과 함께 사람들의 교운기 경험담을 읽고 나니 현재의 무기력함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껴졌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거세고 깊게 느꼈다. 특히 희로애락 중 '로'와 '애'의 감정들을 주로 느끼며 과거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기 보단 '운'이 그렇게 하게끔 만들었다.
내 인생에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다. 그 덕에 즐겁기만 했으면 몰랐을, 행복하기만 했으면 외면했을, 삶의 다양한 부분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비 온 뒤의 단단함을 얻을 수 있었다. 운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급성장한 것이다.
오늘 본 드라마 주인공 남녀도 어쩌면 인생에서 교운기를 맞이한 걸 수도 있다. 얽히고설켜 온갖 감정들을 느낀 끝에 그들은 생각을 바꾸고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신을, 서로를 embrace 한 것이다.
나 또한 교운기의 막바지에 느끼는 이 무력함을 잘 수용하고 싶다. 소용돌이치는 시기가 끝난 뒤 찾아온 이 고요한 시기를 좀 게으르게 보내면 어떠랴.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 감정을 부인하지 않고, 충실하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이 시기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뭐, 회사는 꼬박꼬박 다니고 있으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시기를 조금만 더 잘 버텨 좋은 운을 맞이하자. 교운기의 마지막을 잘 떠나보내자. 이번 챕터의 끝도, 다음 챕터의 시작도 코앞이다. BEEF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Emb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