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소일거리가 생겼다. 아파트 한쪽에 자리한 작은 텃밭 얘기다. 1년간 분양받은 이곳에 이것저것 심어놓고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있다.
상추, 고추, 오이, 가지, 청경채. 평소 자주 먹고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심었다. 농사 지식은 전무하지만, 어디서 주워들은데로 모종을 심을 때는 흙길을 만들어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심은 직후는 물을 듬뿍 주고, 시든 잎은 떼어내며 제법 농사짓는 흉내를 내고 있다.
청경채를 심고서는 후회했다. 노란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청경채는 꽃을 피우면 안 된단다. 요즘 마트에서 한 봉지 천 원이면 여러 개 살 수 있으니 키워서 먹기보단 사 먹는 게 여러모로 좋겠다. 그래도 덕분에 청경채가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는 식물인 줄 처음 알았다. 이제는 텃밭의 미모 담당이다.
참 신기하다. 하루사이 쑥 커버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제일 먼저 열매 맺은 고추를 보고 있으면 참 귀엽고 기특하다. 자라나는 그 순간을 딱 포착하면 좋으련만, 하루에 두세 번 방문으로는 어림없을 테다.
부지런해졌다. 출근하는 날은 아침저녁으로, 주말에는 생각날 때마다 물을 주거나 텃밭 주위를 괜히 돌고 온다. 아침에는 늘 버스시간 맞춰서 최대한 뭉그적거리다 나가곤 했는데 요새는 여유롭게 나가 물을 주고 출근한다. 저녁에도 역시 버스에서 내려 곧바로 집으로 가는 대신 바쁜 걸음으로 텃밭을 향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기꺼이 하게 된다.
텃밭에 물을 주는 기쁨이 이렇게 클 줄 그전에는 몰랐다.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물조리개에 물이 찰찰 한가득 담기는 소리를 들을 때도, 텃밭 구석구석 물을 주며 잎에 맺히는 물방울을 볼 때도, 쑥쑥 자라나 어제와 또 달라진 열매를 자세히 들여다볼 때도, 온전히 자연 속으로 들어가 헤엄치는 기분이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텃밭에서 함께 자라나는 느낌이다.
땡볕 아래 텃밭에서 잡초를 뽑다 문득,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글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람은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를 사랑할 때 활기차게 살 수 있다고 했던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텃밭이 생긴 이후로 전보다 부지런해졌다. 자연스럽게 의욕이 생겼다. 귀찮은 일을 귀찮지 않게 하고 있다. 최근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를 텃밭 식구들이 손잡아 일으켜 주었다고 해야 할까.
의욕이 없다는 건 내 안에 가득한 열정과 애정을 전해줄 대상을 찾지 못한 상태와 같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아니면 일이든, 취미생활이든.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가득 찬 사랑을 무엇인가에 쏟아 붓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닐까. 내면의 그 사랑을 바깥 세계로 전달하는 것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과업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주변에 조금 울적해 보이는 그 사람은 어쩌면 마음속 넘치는 사랑을 전해 줄 곳을 찾지 못해 사랑이 곪아서 우울해진 걸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이제 텃밭 가꾸기를 추천해야겠다. 텃밭 활동이 사정상 여의치 않다면 작은 화분이라도 선물해야겠다.
나 역시 매일 보는 텃밭 말고 또 내가 애정을 쏟을 대상을 찾고 싶다. 주중에는 그것이 일이었으면 좋겠고, 주말에는 글쓰기였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이어도 좋겠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내 마음이 텃밭과 함께 이제 기지개를 켜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