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가을, 아들은 학교 땡땡이를 치고 당일치기로 텍사스 앨파소를 다녀왔다. 공범은 나였다!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하우스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세계 최고 권위의 피아노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 대회에서 최연소 18세의 나이로 우승을 한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2년 후, 또 며칠 전 반가운 소식이 들렸는데, 바로 클래식 음반계의 오스카상, 상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클래식 음반 시상식,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에서 피아노 부분과 올해의 젊은 예술가 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오른 것이다. 그라모폰 어워즈 후보 3 음반 중 2 음반 모두 임윤찬의 음반이었다. 반 클라이번 준결승에서 쳤던 리스트의 초절 기교와 쇼팽의 에튜드 음반 2개였는데 이 두 음반이 치열한 경쟁 끝에 한표 차이로 우승을 한 것이다. 임윤찬이 임윤찬을 이긴 것이다.
임윤찬은 수상 소감으로
“이런 큰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 가족과 선생님들, 위대한 예술가들, 에이전시 관계자들 그리고 친구들”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음악으로 접하게 된 부모님의 음성, 말투부터 눈으로 본 풍경, 새롭게 배운 감각과 지식이 전부 나의 음악에 켜켜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듣거나 느낀 사소한 경험들이 모두 나의 피아노 연주로 표현되어 왔다.
고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2년 전 수상 소감 얘기 중 가야국 우륵에게 영감을 받았다며 산속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싶다던 영혼이 맑은 18세의 피아니스트에게 난 반해버렸다. 산속에서 피아노만 치고 싶다던 그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계를 넘나드는 공연이 이어졌고, 나와 아들은 텍사스와 한국을 오가며 4번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냉전 시절이던 1958년 소련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미국의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1934∼2013년)을 기념하는 대회다. 1962년을 시작으로 4년 주기로 반 클라이번의 고향 포트워스에서 열리는데 2017년에 선우예권이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차지했었다. 그런데 코로나 여파로 대회가 한 회 연기되어 임윤찬이 최소 참가 나이 18세가 되어 참가를 할 수 있었으니, 하늘도 임윤찬의 편이었나보다.
아들이 돌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다고 해서 음악에는 좁쌀만큼의 지식도 경험도 없던 내가 여기저기 귀동냥으로 알게 된 게 반 클라이번 대회이다. 그래서 이번 반클라이번 대회 때 우리 가족 셋은 관람을 하러 갔었다. 2주 동안 파이널리스트들이 펼치는 공연을 날짜별로 가서 관람할 수 있었는데 아들이 여름 피아노 캠프를 가 있어서 아들이 돌아오는 다음날인 토요일 시상식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공연 티켓을 샀다. 2022년 반 클라이번 대회의 오디션은 51개국 388명의 지원자 중 72명이 예선에 올랐는데 12명의 세미 파이널 참가자 중 무려 4명 (김홍기, 박진형, 신창용, 임윤찬) 이 한국인이었다.
혹시 이 한국인 4명 중 우승 후보가 나온다면 이들 중 누군가의 공연은 볼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토요일 마지막 공연 티켓을 샀는데 안타깝게도 임윤찬 공연은 금요일이었다. 혹시 임윤찬이 우승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시상식까지 있으려고 했으나 아들과 남편이 집에 가자고 보채는 바람에 집으로 향했다. 저녁으로 초밥을 먹고 있다가 임윤찬의 우승 소식을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시상식까지 남아 있지 않았던 게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난 이때부터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광팬이 되었고 라디오 방송에서도 그의 우승 소식과 월요일 클래식 코너에서 그의 연주를 종종 틀었다. 그날도 임윤찬 관련 유투부를 보고 있는데 아니! 텍사스 앨파소에서 하우스 공연을 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지금도 이 소식을 알려주신 유투버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엘파소 심포니의 위원회 회장이셨던 Judy Kohlhaas를 기리는 메모리얼 런천 리사이틀이 고인 Judy의 집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는데, 65명까지 입장할 수 있는 아주 private 한 공연이라고 했다.
나는 바로 앨파소 심포니에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아직 티켓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8세 이상 어른만이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리사이틀이 화요일이라 아들 학교도 결석시키고 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입장을 하지 못한다니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당시 아들의 나이는 15살! 덩치도 작아서 어른이라고 속일 수도 없었다. 나는 앨파소 심포니 담당자에게 아들이 장차 피아니스트를 꿈꾸는데 이 공연을 꼭 보러 가야 한다고 사정을 했고 담당자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 메모리얼 리사이틀이 고인의 집에서 열리는 만큼 고인의 가족이 결정한 사안이라고 했다. 그래도 내가 사정을 하자 심포니 디렉터가 그 집에 연락을 해서 물어보고 나에게 전화를 주기로 했다.
나는 마음을 졸이며 며칠을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다시 앨파소 심포니에 전화를 했는데 대답은 예스였다! 특별허락을 받아낸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들과 나는 앨파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이 여행이 우리 둘만의 첫 음악 여행의 시작이었다.
리사이틀이 열릴 가정집에 우버를 타고 도착했는데 그 집은 파란 잔디가 광활하게 깔린 언덕 위에 있는 대저택이었다. 한국 사람은 우리 둘 뿐일 거라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공연 시작 30분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무리의 한국인들이 문 앞에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와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40대 전후반으로 보이는 한국 여성들이었다. 모두들 푸른색 악보책을 하나씩 들고 꽃다발도 들고 서 있었다. 반 클라이번 대회가 있은지 몇 달 후였는데 벌써 이렇게 한국 아줌마 팬들이 모이다니! 그래도 음악에 0자도 모르는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피아노 전공 또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이 들고 있는 악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들은 미국에서 한국 아줌마 무리를 보는 게 신기했는지 주위를 서성거렸는데 앨파소가 아닌 타지에서 온 사람은 우리 둘 뿐이라는 것도 나의 큰 착각이었다. 애틀랜타, 엘에이, 미국의 전역에서 그리고 캐나다에서, 클래식 좀 한다 하는 아줌마들이 임윤찬을 보러 다 모인 것이다.
안내를 해 주시는 분이 임윤찬 군이 아직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입장을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창가에서 어떤 할머니가 이불 같은 걸로 창을 가리려고 혼자 애를 쓰고 계셨다. 가 봤더니 글쎄 윤찬 군이 연습을 하고 있는데 햇빛이 너무 강해서 목이 따가울까 봐 그걸 가려주시려고 사다리에 올라가서 이불로 덮으려고 하시는데 맘처럼 안 돼서 난감해하고 계신 거였다.
사다리 위에서 너무 위태로워 보이는 할머니에게 우리는 도와드리겠다고 했고, 아들이 대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이불을 덮으려는데, 윤찬 군의 연습곡이 창틈으로 흘러나왔다. 윤찬군의 피아노 소리를 처음으로 접하는 순간이었다. 창문 너머 보이는 윤찬 군의 뒷모습과 저 쪽 편에 앉아계신 윤찬 군의 어머니 모습이 참 따스하게 느껴졌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으로 입장을 했더니 곳곳에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졌다. 먼저 뷔페식의 런천을 먹고 집주인이 특별 주문한 스테인웨인 피아노를 가지고 오게 된 사연을 먼저 얘기를 해주었다. 아들과 나는 운 좋게 제일 앞줄에 앉았는데 피아노와 객석에 틈이 없어서 정말 윤찬 군의 솜소리 하나하나까지 들으며 코끝에 맺힌 땀방울까지 숨을 죽이며 보고 있었다. 그의 새끼손가락 손톱 끝이 동그랗지 않고 90도 각을 지게 깎여 있었는데 혹시 그것도 피아노 연주에 계산된 의도된 것인지 궁금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부끄럽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정말 곡과 일치가 되어 마치 자신이 브람스의 발라드 곡이 된 듯 아름다운 연주를 펼쳐 보였다. 앵콜곡으로는 슈만 트로이메라이를 쳤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데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팬클럽 같은 인터넷 소통 창구가 있다는 것도 그날 한국 분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엘파소 하우스 공연 감상후기에
‘마치 거미가 정교한 예술가처럼 그의 몸에서 거미줄을 자아내듯 영혼에서 그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피아노를 통해 자아져 선율로 나오더라’
라는 감상평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앵콜곡 후 그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나갔는데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말이었다.
임윤찬이 나가요!
그러자 한국 아줌마 무리들은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갔고, 그 한국 아줌마에 나도 끼어 있었다. 임윤찬 군은 엘파소 심포니 직원과 어머니와 함께 총총히 문밖을 나서 차로 향하고 있었고, 그 집이 너무나 컸기에 우리는 임윤찬 군이 차에 이르기 전에 그를 에워쌌다. 그대로 보내기에 너무 아쉬웠기에 누군가 용기를 내서 싸인을 부탁했고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일일이 사인을 해주었다.아들은 당시 배우던 드뷔시 악보를 가져가 사인을 받았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한바탕 꿈을 꾼 듯하다.
뒤에 들었는데 앨파소 심포니에서 의뢰한 청중과의 만남은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예술가들은 부끄러움이 많은가보다.
언제 임윤찬 피아니스트를 만날 기회가 된다면 그날 엘파소에서 햇빛을 막기 위해 이불로 막았던 게 바로 15살 내 아들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떠나고 남은 한국 아줌마들은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근처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처럼 당일치기로 온 사람은 거의 없었고 전날 엘파소 심포니 공연까지 보고 일주일 정도 머무른 사람도 있었다. 우린 임윤찬과 피아노라는 공동 주제로 십년지기처럼 가까워졌고 몇몇은 남은 며칠 동안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을 하기도 했다. 내가 자발 해서임찬소 (임윤찬을 사모하는 엘파소 모임)이라는 카톡방도 열어서 앞으로의 임윤찬 공연도 함께 공유하기로 했다. 유일하게 미성년자로 끼여있는 아들을 보며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라고 응원도 해주었다.
그리고 2주 후 Forthworh Kimbell Art Museum에서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Cliburn Concert가 있었는데 나는 이 공연 티켓을 사기 위해 Fortworth 심포니에 계속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고 또 확인을 했다. 다행히 티켓은 구할 수 있었고, 브람스의 Four Ballades와 멘델스존의 Fantasy in F # Minor, Liszt 리스트의 Deux 듀 Legendes, 앵콜곡으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Aria를 감상할 수 있었다. 임윤찬 피아니스트와 찍은 아들의 사진과 내가 지은 삼행시를 액자에 넣어 다른 선물과 준비를 해갔는데 직접 전해줄 수는 없다고 해서 공연 담당자에게 맡기고 돌아섰다.
공연 후 임윤찬 피아니스틀 혹시 만날 수 있을까 주차장에서 서성거려 봤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고 누군가 주차장에서 임윤찬 군을 마주쳐서 사진을 찍었다는 소식을 인스타를 통해 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자신보다 3살 많은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본 아들은 집에 오자마자 피아노로 달려갔고 피아노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피아노 선율에서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작년, 임윤찬이 Forth Worth Sympony와 협연을 해서 아들과 남편과 함께 공연을 보았고, 11월에 한국에서 정명훈 지휘자가 이끄는 독일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임윤찬이 협연을 해서 마침 한국을 방문한 터라 볼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 터라 광속으로 티켓이 매진될게 뻔했기에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친구는 닮는다고 했던가! 막중한 티켓구매의 임무를 수여받은 내 친구는 공연 관계자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미국에서 공연을 보러 온다고 티켓을 무슨 수가 있어도 사야 된다며 공연 장소 최고 책임자하고 통화를 해서 티켓을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윤찬을 보러 간 4번의 아들과의 여행, Fortworth로 앨파소로, 한국으로 우리 모자는 열심히 뛰어다녔고 오늘도 우리 집 거실엔 아들의 베토벤 소나타와 쇼팽의 에튀드가 들린다. 어느덧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아들에게 오늘도 조용히 맘 속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