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7.(월)
병원에서 '뇌조형술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검사를 위해서 어머니가 누운 이동침대가 집중치료실에서 미끄러지듯이 나왔다. 제주도에 오고 처음 어머니를 대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동침대의 움직임이 빛의 속도이다. 젊은 남자간호사는 신속하게 일하기 위해서 건장한 몸에서 나오는 힘으로 침대를 훅 밀고 지나갔다.
삼 남매는 졸지에 뛰어 쫓아가는 꼴이 되었다. 어머니! 어머니! 를 부르면서.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면 우린 어머니 얼굴을 내려다보지 못할 뻔했다. 간호사는 무신경하게 버튼을 누르고, 무표정하게 시선을 어디론가 향했다. 가족의 재회와 상봉의 감동, 걱정 같은 것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문이 열리자 다시 빛의 속도로 침대가 움직였다. 그리고 검사실 안으로 어머니의 침대는 사라졌다. 빠르게.
시간이 지나고 담당교수가 나왔다.
"어머니의 의식은 살아있다, 혈관에 막힌 혈전을 제거하는 수술방법이 있는데, 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수술을 최우선적으로 권하겠지만 어머니는 노령이니 수술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또 만에 하나 잘못되면 지금 있는 의식마저 손실될 수 있으니, 이 점을 감안하고 보호자인 자녀들이 결정을 하라."는 것이었다.
무거운 요청이었다. 아까 잠깐 봤던 어머니는 눈을 뜨고 우리를 보고, 알아봤는데, 수술로 그것마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면 너무 두려운 말이었다.
담당교수를 대면하기 전에 삼 남매는 수술은 원치 않는 것으로 하자고 의견일치까지 갔었어도, 의사의 말 한마디마다 가슴은 저릿하게 아파왔다.
다시 어머니는 이동침대에 실려 집중치료실로 옮겨졌다. 빠른 속도로.
오늘 쓰러진 어머니를 이동침대에 눕혀 검사실로 들어가는 걸 보는 게 내 인생 처음이었다. 어머니도 뇌경색환자가 되어본 게 처음이었다.
서로 쳐다보는 짧은 순간이 애틋하다. 하지만, 어머니를 옮기던 간호사는? 얼마나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을 이제까지 봐왔을까?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일, 침대에 누인 환자를 가장 빠르게 이동시키는 그 일 자체에 충실했던 그를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나?
보호자는 뛰어 쫓아가든, 가다가 넘어지든. 엘리베이터에서 보호자가 다 같이 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그가 베풀 호혜는 충분히 베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오늘 제대로 병원이 어떻게 사람을 사물화 할 수 있는지 첫 경험을 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병원생활을 하게 되면 이런 순간들을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다는 불쾌한 기분도 함께. 이제껏 병원 신세를 크게 져본 적 없는 나에겐 낯선 경험이었다.
환자는 병이 치료되기까지 머물러야 하는 곳이고, 직원은 매일매일 일상의 업무들을 수행해야 하는 곳. 일상이 효율적으로 되려면 감정을 제거한 기계적인 반복이 더 효과적이겠지만, 병원은 몸이 아픈 환자와 정서적인 타격을 겪는 보호자가 있는 곳이라, 조금은 더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보호자 입장의 과한 희망사항일까?
모를 일이다. 병원이 일터가 되면 나도 어떻게 될지. 그들대로의 고충을 안다고 자신할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