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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Mar 21. 2023

빈 집

홀로 우는 밤

2022. 3. 9. (수)

아침, 언니를 차에 태우고 제주대병원으로 갔다. 내가 운전한 차는 몇 년 동안 내가 출퇴근하며 탔었다. 남편이 '형님이 제주에 가서 어머니와 지낼 때 그래도 자가용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어차피 중고로 내어놓을 거라면 형님에게 주자'라고 했다.


남편은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직접 차를 몰고 폭풍우몰아치는 작년 8월 어느 날 인천을 출발해서 목포까지, 그곳에서 배를 타고 제주항을 거쳐, 시골집으로 차를 배송했다.


오빠가 남편의 코치를 받으면서 무려 30여 년간의 장롱면허를 벗어나기 위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아뿔싸, 하필이면 좁은 시골길로 들어섰을까, 마주 오던 차를 피하려고 너무 일찍 핸들을 돌리다가 저 혼자 돌담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혼자 운전하는 것도 맘이 편치 않은데, 어머니까지 모시고 운전하는 것은 더더욱 엄두가 안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빠는 튼튼한 다리와 넘치는 시간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는 걷는 게 좋다며 차님을 공터에 모셔두었다. 닦고 광내며 '우리 집도 차가 있다'는 전시용 정도나 됐을까.


제주대병원 앞에서 오빠와 언니는 바통터치를 했다. 이번에는 오빠를 옆에 태우고 운전을 하고 집으로 왔다. 오빠는 집에 올 때는 집에서 할 일에 마음이 급하더니, 정오를 넘겨가자 이번에는 병원으로 갈 길에 마음이 급했다. 오빠를 태우고 다시 제주대 병원으로 간다.  


오후 다섯 시, 삼 남매가 제주대학교 병원 출입문 밖에서 만났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언니와 오빠의 얼굴에 주름을 더 짙게 만들었다. 마음이 추운 건지, 몸이 추운 건지 모두 조금씩 떨고 있었다. 이 짧은 만남 뒤로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 지를 기약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언니는 서울로, 오빠는 병실로, 나는 시골집으로.


이번에는 혼자 중산간도로를 따라 운전했다. 제주의 하늘과 바다가 마치 그림인 듯 아름다웠다. 마음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제주의 풍광이 내 마음에 위로가 되어주었다. 날씨만 보면, 인생사의 어둡고 슬프고, 괴로운 일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날이었다.


마을 공터에 주차하고 시골집에 도착하니 마당 가득 늦은 저녁 햇살이 비추고, 공기에 따스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집 안은 여전히 싸늘했다. 초봄의 햇살이 집안의 공기까지 덥히기에는 무리였다. 몸이 떨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고, 방바닥에 깔아 놓은 온열장판으로 가서 담요를 걷어 몸을 집어넣었다. 뜨끈한 바닥에 누운 채 이런저런 생각을 시작했다. 백신 접종 14일 후부터 간병이 가능하다면 나는 빨라야 3월 22일에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러면 내가 최대한 간병을 빨리 시작한다고 치고, 그 시간까지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병실에 간병인으로 들어가서 뇌경색 환자를 어떻게 간병을 해야 하는 거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 건가? 하는 의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책상 컴퓨터로 가 앉았다.


검색어, 뇌경색 간병


그날 밤 오래도록 책상 앞에 있었다.  검색어에 걸린 내용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왜 이렇게 생소한 건지 스스로 물었다. 아버지도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생활 끝에 돌아가셨는데도...... 그때 나는 나 자신을 간병의 책임자로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계셨고, 오빠가 있었고, 언니가 있었고, 맨 끝이 내 자리였다. 게다가 당시 나는 퇴사하고, 모은 돈을 털어 어학연수한다며 외국에 나가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시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시 귀국해서 아버지를 뵀고, 연수 마치고 귀국했을 때가 6월. 그때 며칠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며칠 지내다가 다시 서울 생활 시작하고,  아버지는 그 해 8월에 돌아가셨다.


내가 몰라도 너무 많이 몰랐던 거였다. 내가 너무 많이 몰랐던 거였다.

그저 나는 어머니 곁에만 있었을 뿐,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호자, 간병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질문들과 답글들을 읽으면서, 앞으로  어머니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무섭고 싫어졌다. 얼마나 병상생활이 오래갈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에 가슴이 답답했다.


눈물이 났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우리 남매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돌아가신 먼 기억 속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 곁에서 병시중을 했던 어머니의 시절을 생각하면서.


싸늘하고 휑한 집에서 나는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

내일이면 나마저 떠나고 나면 인적 없는 빈 집으로 남을 그곳에서 오래도록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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