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밤의 폭풍우는 멈췄지만 하늘은 온통 회색구름으로 낮게 내려앉았다. 밤 사이, 어머니는 땀을 흘리고, 가래와 고르지 못한 호흡, 무엇 때문인지 모를 신음을 하며 일으켜라, 눕혀라 요구했다. 침대를 올렸다 내렸다, 어머니 상체를 일으켜 안아있다가 눕혔다를 반복하다 보니 새벽이 왔다.
어머니를 안아 얼굴을 내 어깨에 대도록 하고 몸을 지탱하는 사이 콧줄이 움직였는지 아침이 되고 보니 콧줄이 15센티는 빠져있었다. 난감했다. 콧줄삽입의 도돌이표. 아침 피딩백 식사를 위해서는 어쨌든 조치가 필요했다.
전날 어머니 몸을 닦고, 머리를 감기고, 환자복과 시트를 갈아드린 게 무색하게 밤새 흘린 땀으로 몸과 옷이 척척했다. 오전은 다시 몸을 닦고, 옷과 시트를 갈아드리는 일을 하면서 지나갔다.
"헌저(어서) 가라."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내가 병원에 오고 이삼일이 되자 나보고 빨리 가라고만 했다. 어머니가 틀니가 없는 상태에서 말을 하면 어떤 때는 분명히 소리가 들리고, 어떤 때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저 말은 잘 들렸다.
내가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갈 때쯤 어머니는 눈을 뜨고 있었다.
"어머니, 나 이제 감쑤다. 인천으로 갈 거.
아덜이 올 거마씨. 다음에 나 올 때까지 잘 이서예."
어머니 귓가에 대고 잘 알아듣게 힘주어 말했다.
"오. 헌저 가라."
오후 두 시, 오빠와 제주대병원 간병인 교체 출입구에서 만났다. 오빠는 길게는 삼주, 짧게는 이주 정도의 간병을 염두에 두고 배낭에 자기 짐을 챙겨 왔다. 그다음은 또 나의 차례가 될 것이다.
김포공항 출구를 빠져나왔다. 남편이 서 있었다. 묘한 기시감, 아니면..., 소환된 기억이라 해야 할까.
2001년 6월, 밴쿠버발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 도착했다. 출구를 나올 때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 년 반 정도의 어학연수를 끝냈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때 나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봐야 한다는 부담감에 막막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고맙고도 반갑게,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어느 날 국제전화로 사랑을 고백한 남자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어머니와 보낸 7박 8일의 시간,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나는 앞으로의 시간들을 생각하며 울적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고맙고도 반갑게, 매일같이 전화로 안부를 묻던 남자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21년 전 만날 때는 심장박동수가 올라가며,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심장이 묵직하게 조여 오고 잔잔한 웃음만 떠올랐다.
마주 대하고 섰을 때 목이 메어왔다. 눈물이 날 것도 같았는데, 한 번 싱긋 웃자 다 괜찮아졌다. 주차장까지 걷는 동안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김포의 하늘이 너무나 푸르고 맑아서, 내 기분이 좋다는 말만 했다. 남편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이 말 저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게 좋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내 말을 기다려줬다.
연인이 되기 전, 남편은 고마운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혼도 했다. 고마운 사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