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순례길 탐방
애월리에는 마을의 오랜 역사와 문화, 애월십경을 동시에 둘러볼 수있는 마을 순례길이 있다.
순례길은 2014년부터 마을을 알리고자 마을에서 코스를 개발하고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전체거리 약 6km, 순례 시간은 유람하듯 마을해설사와 같이 돌아본다면 5시간 내외가 소요된다.
리사무소에서 출발 -> 벌런동산 -> 하물과 장공물 -> 애월포구 -> 애월진성 -> 도대불 -> 남당 -> 큰물과 알원 -> 환해장성 -> 손두벌물 -> 애월연대 -> 배무숭이-> 한담, 가린돌 -> 장한철 생가와 표해기념비 -> 솔발이 -> 포제단 -> 느티나무 쉬는 팡 -> 절왓 -> 리사무소 순이다.
작년 겨울 마을에서 순례길을 돌아보는 행사가 있었다. 나도 애월리를 여러번 방문하면서 한번쯤을 순례길을 돌아봐야지 하는 생각이었기에 참여를 했다.
"2023 애월순례길 걷젠 - 애월 순례길 걸으멍 들으멍" 행사다.
오전 11시에 애월리사무소에서 출발을 하기로 했다. 10분전 도착은 했으나 주위에 주차시설이 없는 곳이다. 주위를 맴돌다가 갓길 주차를 하고 출발지로 가니 출발 인증샷을 하고 있었다.
"빨리옵써, 왕 인증샷 찍읍써(제주어: 빨리오세요, 와서 인증샷 찍으십시요)" 모두가 손짓을 하며 난리다.
우리가 가서 자리를 잡자면 대열이 흐트러질것 같아서 살짝 꽁무니를 뺏다.
출발을 하자 50~60명이 무리를 지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는 마을해설사가 휴대용 스피커와 마이크를 잡고 설명을 하면서 무리를 이끌었다. 이장님하고 가벼운 인사를 하고 우리도 앞의 무리를 따랐다.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모든 포인트를 볼 수는 없고, 중요 포인트만 설명하겠노라고 했다.
오늘 들릴 곳은 전체 순례길중
" 하물,장공물 -> 애월포구 -> 애월진성 -> 도대불 -> 남당 -> 큰물과 알원 -> 애월환해장성 -> 손두벌물 -> 배무숭이 소금밭 -> 한담 -> 장한철 생가" 라고 미리 귀뜸을 했다.
그외의 장소는 내가 별도로 답사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엮어서 설명을 한다.
애월 순례길의 출발 장소다.
정면에는 3층 규모의 넓고 큰 애월리 복지회관이 있고, 뒷편에는 실내 게이트볼장, (구)향사가 있다.
애월리는 조선말 제주목 신우면 소속이었고, 마을의 면소재지는 인근 신엄리였다. 일제강점기 면소재지를 애월리로 옮기면서 면의 이름도 애월면으로 바꿨다. 현재의 자리에 애월면사무소가 있다가, 1986년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애월리 복지회관을 신축했다. 복지회관 뒤편에는 아직도 1905년에 지어진 향사가 예전 모습 그대로 있다.
리 사무소 정문을 나서면 나오는 폭낭 바로 앞이다. 즉, 지금의 복지회관이 있는 위치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마을 포구에 파도가 들면 이 언덕에 의해서 꺽였고, 이 언덕으로 인해 포구는 초승달 모양으로 되었으며, 돛단배는 지금의 신협 안쪽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그 후 인구가 유입되면서 초승달과 같은 조석대는 매립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시대 이 동산에 면사무소가 지어졌다.
벌런 동산을 내려와서 마을의 중심지인 사거리를 건너면 길가에 바로 보인다. 제주의 마을은 식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하물(큰물)은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의 양이 풍부해서 이 주위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2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째칸은 식수, 두번째칸은 빨래터와 야간에 여자들의 노천 목욕탕으로 이용되었다. 주변은 매립되고 1980년대 공원 조성 사업과 2002년 복원사업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이 변했다. 여러 차례 복원과 정비사업을 거치면서 용천수의 수량이 급감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1987년 한국의 명수 100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마을의 중요자원으로 현대식으로 잘 정비하여 관리하고 있다. 하물의 동남쪽에는 남자들의 목욕탕인 장공물이 있다. 이곳에는 1926년 치수비가 세워져 있다.
하물을 보고 오른쪽으로 애월초등학교 서문을 행해서 가다가, 부두식당을 돌면 왼쪽에 허름하고 작은 포구가 보인다. 옛 포구다. 포구 다리 밑으로는 옛 물길을 따라 물이 흐른다. 지금은 주변이 매립되었지만 이 물길은 돛단배가 들어올 정도로 큰 물로 지금의 애월신협과 애월리사무소 앞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 포구 맞은편 바닷가쪽으로는 새로 만들어진 신 포구가 보인다.
옛 이름에 애월포라고도 했다. 그만큼 애월의 포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사항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쪽에 조천포와 같이 육지에서 제주로 오가는 배의 도착지와 출항지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일본을 오가는 대형 여객선인 군대환이 경유하는 항이었다고 한다.
옛 포구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거대한 돌담이 나온다. 애월 진성이다. 애월초등학교는 애월 진성을 울타리로 사용하고 있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를 방어하기 위해서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조선시대 포구에 있는 돌로 성을 쌓았다고 한다. 남문과 서문이 있었으며, 현재 보이는 바다와 접한 북측 성벽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벽에는 미석(楣石)·총안(銃眼)·회곽도(廻廓道)·여장(女墻) 등이 남아 있어 당대 해안 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추후 복원된 남측 성벽은, 원형인 북측 성벽과는 축조 방법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옛 포구를 지나 어촌계 건물을 뒤돌아가면 해안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도대불이 있다.
애월리 도대불은 1930~1935년 사이에 밤에 조업 나간 배를 유도하기 위해 마을 어부들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망등이나 등대라고도 한다. 원래 위치는 애월포 선창가 암반 위에 있었다①. 도대불은 마을 진흥회에서 관리했으며 등화시에는 석유 등피를 이용하여 불을 밝혔다. 애월리 도대불은 도로가 건설되면서 무관심속에서 방치되었다가 ②번과 같이 1차 복원되었다가, 해안 도로 건설 이후 해체되어 지금은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2003년에 만들어진 도대불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대불을 보고 해안도로로 나와 서쪽으로 가다 보면 바다 쪽에 네모 모양으로 둘러진 돌담이 나온다. 마을에서 바다신을 모시는 남당, 해신당이다. 마을에 해녀들이 많을 때, 해녀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당으로서 매년 1회 마을포제가 끝난 다음 날 당굿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용왕과 영등신도 청하여 하루종일 굿을 했으나, 지금은 현대화에 따라 유교식으로 올린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마을 안길을 벗어나서 바닷길로 들어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