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롱불 Apr 16. 2023

안녕하세요, 행복을 드리는 우체국입니다.

우체국 직원의 하루 엿보기

  "행복을 드리는 우체국입니다."



  우리 우체국의 인사방법이다. 우체국마다 앞에 친절히 모시는, 행복을 드리는 등의 미사여구를 붙여 인사하거나 전화를 받는다. 아직은 익숙지 않다. 그냥 안녕하십니까? 우체국입니다. 담백하게 하면 안 될까 싶지만, 어쩌겠는가? 하라면 해야지. 물론 강제는 아니다. 다들 하시니 따라할 뿐.




  내가 근무하는 우체국과 집은 10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자가용을 이용한다면 30분 만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지만 불행히도 나는 자가용이 없다. (으레 그렇듯 입대할 즈음해서 벼락치기로 면허를 딴 이후 장롱면허가 된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30분이 소요되는 출퇴근 거리가 2배로 늘어나게 된다. 빨리 중고차 한 대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다.



  이른 아침에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선 익숙한 얼굴들을 만나게 된다. 서로 말은 안 하지만 매일 보다 보니 어느 정도 친근한 느낌이 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 서로 같은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이 시간에 계시는군' 하며 익숙해진 정류장에서 익숙해진 사람들과 지겨운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들어와도 상황은 비슷하다. 꾸벅꾸벅 졸고 계시는 중년 아저씨, 전문가 같은 손길로 빠르게 화장을 하시는 분, 나와 같은 지하철을 타고 내려서 같은 버스까지 타는 , 심지어 가끔 마주칠 수 있는 우리 관내국 팀장님까지. 가벼운 지루함과 옅은 졸음과의 싸움에서 벗어나 8시 30분 즈음 우체국 앞 정류장에 내려 출근을 한다.



  9시에 영업을 시작하는 우체국은 30분 전부터 바삐 움직인다. 무인우편접수 키오스크를 켜고, 아침에 결재를 받아야 하는 문건을 정리하고, 전날 마감 이후 받은 우편물을 다시 분배하고, 등기우편자루 꺼내놓고, 모자란 소포박스를 채워 넣고, 우편물류시스템과 행정포털 켜고, (텀블러에 커피 타오고, 파발마 켜고) 영업 전 아침시간은 특히나 시간이 빠르게 간다.



  8시 56분 즈음해서 닫아놓았던 철문을 개방하며 우체국은 고객님을 응대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급하신 고객님들은 9시 이전부터 문 앞에 대기하시는 경우도 있다.  "어차피 12시가 넘어야 오전 물량이 발송되니 미리 오셔서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해드리고 싶지만 투머치토커 공무원은 오후까지 버틸 체력이 남지 않을 것임을 알고 조용히 접수를 받는다. 창구에서 근무하는 나는 국내일반(우체통에 넣는 편지), 국내 등기(등기와 택배), 국제일반(해외로 보내는 편지), 국제 등기(국제소포와 EMS, EMS프리미엄), 내용증명, 전자수입인지 발급 등의 업무를 본다.



우편창구에서는 고객님들마다 정해진 패턴이 있다.  

패턴 1. 우체국을 처음 방문해 보는 고객님들.
번호표를 호출하면 오셔서 우물쭈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시거나 "저... 이거 보내려고요...."라는 말씀을 하신다. 찰떡같이 알아듣고 "등기 보내시는 거죠? 택배(소포) 보내시는 거죠?" 되묻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패턴 2. 우체국을 애용하는 베테랑 고객님들.
창구 2보 앞에서부터 "빠른 등기요", "일반등기요", "사전접수요" 외치며 걸어오신다. 이런 경우는 잔말 말고 최대한 빠르게 타이핑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자주 찾아주시는 고객님들에겐 속도가 곧 친절함이다. 입사 초기에 어버버 하며 제대로 접수를 못 하고 옆에 계신 팀장님께 어떻게 하는지 여쭤보는데 고객님이 느린 일처리에 상당히 언짢아하셨던 경험이 있다. (모르는데 어떻게 해요...) 답답하셨는지 직접 어떻게 접수하라고 알려주시는 베테랑 고객님들도 계신다.  일례로 우체국에서 제공하는 소포박스는 부피 규격을 자동으로 불러올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직접 줄자로 둘레를 재고 있던 출근 첫날의 저에게 "그거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라고 말씀해 주신 고객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없는 우편창구에선 베테랑 고객님들을 맞이할 때가 가장 좋다. 어떻게 접수를 하는지 어떤 걸 물어보는지 미리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등기를 보내시는 고객을 예로 들자면 "봉투를 저울에 올려주세요", "빠른 등기로 보내시나요 일반등기로 보내시나요?", "등기내용 모바일로 받아보시겠습니까?", "영수증은 모바일로 드릴까요 종이로 드릴까요?", "결제는 카드로 하시나요 현금으로 하시나요?"라는 5번의 질문과 답변 과정이 필요하다. 베테랑 고객님이 "빠른 등기로 모바일영수증에 카드결제요"라고 말해주시면 모든 과정이 1분 안에 처리가 끝날 정도로 간편하다. 시끄러운 창구에서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같은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쌓여가는 대기고객 인원수에 식은땀이 삐질 흐르게 된다.



  우리 우체국은 인터넷 기사에서도 가끔 언급되는 주제인 우체국 점심시간 휴무제도를 적용한다. 12시에 우체국 셔터를 내리는데 사실 말이 12시지 진짜 12시는 아니다. 11시 59분에 고객님이 오시면 그대로 그 고객님 업무를 처리해드려야 한다. 12시에 셔터를 내려도 점심시간이 10분 정도 늦어질 때가 있다. 운이 안 좋다면 12시 10분에 점심을 먹으러 나가서 12시 50분에 후다닥 뛰어들어와 양치하고 56분에 다시 우체국을 개방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적 특성상 이런 푸념 자체가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마음 아픈 점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보다. 셔터를 내리고 쉬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자체에 화를 쏟아부으시는 고객님들도 계신다. "내가 왜 점심에 우체국을 이용 못 하고 기다려야 되는데? (너네 내가 내는 세금으로 운영하잖아!)" 이럴 땐 국장님이나 팀장님이 나서주시긴 하지만 억울해도 화낼 수 없고 항상 설득해서 일을 무마시켜야 한다는 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것 분명하다. 흔히 말하는 악성민원에 대한 부분에선 말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몇 개 있다. 기회가 된다면 가볍게 써볼 계획이다.

  그래도 아직 신입이라 그런지 오래 걸리는 금융이나 우편 고객님이 오시면 국장님이나 다른 주무관님들이 대신 접수해 주실 때가 많다. 일은 바쁠 때가 많지만 좋은 분들과 같이 일한다는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우체국은 작년부터 점심시간 휴무제를 적용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점심시간 이후에 긴 오후 업무를 시작한다. 오전 업무와 차이점은 별로 없다. 단지 오전에 오신 것보다 2배 이상의 고객님들이 오시기 때문에 더 바쁘다는 것뿐.  특히 중간에 50부 이상의 내용증명을 접수하거나(우리 관내국은 천공기가 없기 때문에 수작업으로 일부인(도장)을 찍어야 된다.) 100부 이상의 등기를 접수하면 정신이 나갈 것 같다. 한 시간 동안 단순반복작업을 하다 보면 주소를 잘못 입력하는 등의 실수를 하는 경우가 생길 위험이 크다. 안 그래도 4일 차에 주소를 바꿔 적는 끔찍한 실수를 했던 나는 풀어지는 정신줄을 필사적으로 잡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창구직원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잘못했으니 책임지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업무 중 따로 휴식시간은 없다. 고객님들이 없을 때 눈치껏 쉬긴 하는데 그리 편하진 않다. 아무도 없어서 잠깐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려하면 우르르 입장하시는 우리 고객님들. 2번 창구에서 접수해드리겠습니다. 3시 정도가 되면 팀장님께서 창구직원 돌아가면서 차 한잔하고 오라 하신다. '우리 팀장님은 진짜 천사이신 걸까....?' 생각을 하며 비공식적인 쉬는 시간을 갖고 남은 3시간을 버티면 된다. 4시 30분에 금융창구가 먼저 마감되고 우편창구 수납마감을 한 이후 5시에는 우체국 앞에 있는  우체통 확인 후 우편물 수거, 5시 30분에는 오후 우편 수거차량 차립 후 상차 작업(비 오는 날에는 정말 정말 하기 싫다). 이후에 6시에 영업마감을 하고 결재서류를 만들고 사무실 정리 후 퇴근한다.



  공무원은 칼출근/칼퇴근이 최대 장점이라고 들었는데 현장은 좀 다른가보다. 다른 부처처럼 시간 외 수당을 받으면서 오래 일하는 건 아니지만 자질구레하게 늦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하며 지겨운 버스를 타고 의자에 몸을 기대어 저물어가는 창밖 풍경을 구경한다. 어젯밤 자기 전 했던 '내일부터는 퇴근 후 운동하고 공부하고 글도 써야지' 따위의 생각들이 감기는 눈꺼풀과 함께 점차 흐려진다. 시보가 해제될 즈음에는 퇴근 후 알차게 자기계발을 하는 직장인이 될 수 겠지 다짐하는 우체국 직원의 하루가 이렇게 끝난다.

이전 04화 국가직 9급 필기시험 시험감독관 후기를 쓰게 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