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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신고전주의, Part 3.

Christian McBride & Terence Blenchard

by XandO

위대한 베이스 연주자,

크리스천 맥브라이드(Christian McBride, 1972~ )는
1990년대 신고전주의(Neo-Bop) 운동의 핵심 주자로 등장해,
현재는 재즈의 경계를 넘어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아우르는 현대 재즈의 대표적 마에스트로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출신인 그는

어릴 적부터 연주하던 일렉베이스에 12세부터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병행한다.


Sitting On A Cloud - Christian McBride


1996-7년 즈음,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날은 크리스천 맥브라이드가 직접 학교를 찾아와

재학생들을 위한 워크숍을 열었다.
무대 위의 그는 여느 때처럼 편안한 캐주얼 차림에,

묵직한 베이스를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짧은 인사 후, 활을 든 채로 첫 소절을 연주한다.
그날, 그의 아르코 소리는 유난히 따뜻하고도 탄력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재즈 베이시스트가 활을 쓰는 모습은 흔치 않았기에
학생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 소리에 취했다.

연주가 끝나자 학생 중 하나가 물었다.


“보통 재즈에서는 아르코를 자주 쓰지 않는데,
왜 선생님은 활 연주를 자주 하시나요?”


맥브라이드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말이지…

뉴욕에서 막내 시절에 생긴 버릇이에요.”


그는 이어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 시절, 난 늘 막내였죠.
모든 선배 연주자들이 차례대로 10분, 20분씩 긴 솔로를 돌리고
제 차례가 올 땐 이미 템포 300짜리 연주가,

한 시간은 넘게 이어진 후였어요.
손가락은 이미 완전히 녹초가 돼 있었죠.
그런데 꼭 마지막에 제게 긴 솔로를 넘겨주더군요.”


그는 그때의 표정을 그대로 재연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도저히 피치카토로 솔로를 연주할 힘이 없어서,
그냥 활을 집어 들었어요.
그렇게 아르코를 반강제로 실전에서 배웠죠.”

강의실은 폭소로 가득 찼다.

누구보다 철저히 ‘밴드의 리듬’을 중시하는 연주자였지만,
그 리듬 안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찾아낸 셈이었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지금도 생생하다.




1989년 줄리아드 진학 후

곧바로 뉴욕 재즈 신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로이 하그로브, 프레디 허바드, 윈턴 마살리스 등의 그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신고전주의(Neo-Traditionalism) 운동의 대표 세대인

‘영 라이언(Young Lion)’ 중 한 명으로 주목받는다.

퓨전보다 비밥·하드밥·스윙의 정통성을 추구하며,
그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복원하려는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데뷔작 < Gettin’ To It >(1995)은 하드 밥의 형식을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젊은 세대 특유의 활력과 블루스적 온기를 담아냈다.
이는 신고전주의의 핵심 정신,

즉 “형식을 되살리되 감정은 현재에 머물라”를

가장 순수하게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The Shade Of The Cedar Tree - Christian McBride


2000년대에 들어서며 맥브라이드는 신고전주의의 언어를 기반으로,
그만의 재즈 문법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 Vertical Vision >(2003)은 그가 새로운 리듬 구조와 전자적 사운드의 질감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재즈 문법에 도입한 시기로,
펑크(Funk)와 퓨전(Fusion)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대표곡 [ Tahitian Pearl ]과 [ Technicolor Nightmare ]는
로이 하그로브의 The RH Factor와 유사한 포스트-퓨전(post-fusion)적 접근을 보여준다.


Technicolor Nightmare - Christian McBride


이 시기의 크리스천 맥브라이드는 실력 있는 베이스 반주자로서 뿐 아니라
리듬·멜로디·화성을 동시에 주도하는 베이시스트로 변모한다.
그는 신고전주의의 틀 안에서 출발했지만,
그 전통의 틀을 스스로 해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합하여

전통을 살아 있는 재즈의 언어로 재구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맥브라이드의 예술적 궤적에서 주목할 점은,
재즈의 고유한 언어를 보존하면서도

대중음악과의 유기적 연결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스팅(Sting)의 < It’s Probably Me > 라이브,
디앤젤로(D’Angelo)의 < Spanish Joint > 세션 등에 참여하면서
서로 다른 장르의 거장들과 협업하여 재즈를 대중음악의 질서 안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D’Angelo와의 협업은 네오 소울(Neo-Soul)과 재즈 리듬의 조화를 통해,
“재즈는 여전히 흑인 대중음악의 심장”임을 증명한다.
이 시기의 맥브라이드는 단순한 유명 재즈 연주자를 넘어
현대 흑인음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선구자적인 인물로 자리한다.


Consider Me Gone - Christian McBride & Sting


2010년대 이후, 맥브라이드는 리더십과 작곡 능력을 겸비한 거장으로 자리한다.
그의 빅밴드 앨범 < The Good Feeling >(2011)은

정교한 편곡과 앙상블로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현대 재즈 빅밴드 사운드의 기준점을 제시한다.
[ Bluesin’ in Alphabet City ]는 전통적 스윙과 블루스의 감성 위에

현대적 화성과 사운드를 얹어
‘재즈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현대 빅밴드 사운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수작이다.


Bluesin' In Alphabet City - Christian McBride


또한 < Christian McBride’s New Jawn >(2018~) 시리즈에서는
본인의 베이스와 색소폰·트럼펫·드럼만으로 구성된 정통 쿼텟을 이끌며
베이스를 중심으로 한 자유도 높은 즉흥연주를 실험했다.
자칫, 텔로니우스 몽크의 유머러스한 프레이징과 괴팍한 리듬 감각을 연상시키는

[ Walking Funny ]에서는 그의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즉흥성이 신선하다.
재즈가 여전히 인간적이고 생동하는 예술임을 몸소 연주로 증명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의 재즈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Walking Funny - Christian McBride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윈튼 마살리스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재즈를

‘살아 있는 전통’으로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하드 밥과 비밥의 황금기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며,

재즈의 기본 형식과 감정을 정교하게 복원한 것이 이 운동의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조슈아 레드먼, 로이 하그로브, 크리스천 맥브라이드로 이어지는 ‘영 라이언’ 세대는

단순한 전통 계승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적 재즈 언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1990년대 미국 재즈역사를 새롭게 써 나아간다.


이 맥락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국 음악의 거장이 있다.

그는 바로,

신고전주의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서 재즈의 영역을 넘어

미국 음악과 예술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을 극적으로 확장한 인물인

테렌스 블렌차드 ( Terence Blenchard )이다.


뉴올리언스에서 윈튼 마살리스와 함께 성장하며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윈턴 마살리스의 아버지인 엘리스 마살리스에게 음악 교육을 받은 테렌스 블란차드는,

1982년 아트 블래키 & 재즈 메신저스에 합류하며

하드 밥과 비밥의 정수를 체득해 간다.


Wandering Wonder - Terence Blanchard


그의 1991년 솔로 데뷔 앨범 < Terence Blanchard >에 수록된 [ Wandering Wonder ]는

비밥과 하드밥의 구조 위에 세워진 신고전주의 재즈의 엄격한 틀을 유지하면서도,

리듬 섹션의 정교한 조화와 구조적 긴장감 속에서도,

격정적인 전통의 비밥 즉흥연주보다는

점진적으로 발전되는 지적인 멜로디의 ‘서사’를 선택한다.
멜로디가 점층적으로 고조되며 하나의 장면처럼 느껴지는 이 구성은,

어쩌면,

훗날 그가 스파이크 리(Spike Lee)와 협업한 영화음악에서 구현할

영화음악적인 감각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 Wandering Wonder >는

재즈를 단지 연주의 영역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음악을 통한 이야기의 예술로 확장한 출발점이 된다.


실제로, 테렌스 블랜차드는

이후 영화음악 작곡가로서 성공하며

재즈가 태생적으로 지닌

미국사회 안에서의 인종과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담론들을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소리로 펼쳐 보인다.


1990년대 초,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 모 베터 블루스(Mo' Better Blues) >의 사운드트랙은

신고전주의의 또 다른 주역이자 윈턴 마살리스의 형인 브랜포드 마살리스가 이끄는

쿼텟과 블랜차드의 협업으로 완성된다.

80년대 신고전주의 재즈의 핵심 인물들이 모여 만든 영화 O.S.T 앨범이다.
이 영화 속 덴젤 워싱턴 ( 주인공 브릭 길리엄 역)의 트럼펫 연주 장면이

실제로는 테렌스 블랜차드의 연주이다


Mo' Better Blues - Terence Blanchard


사실 스파이크 리 감독과 테렌스 블렌차드의 인연은

이 영화 < 모 베터 블루스 > 이전에 시작된다.
1989년 <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 >에서
그는 트럼펫 세션으로 짧게 이름을 올린다.
그 짧은 만남이 감독의 기억에 깊이 남았고,

< 모 베터 블루스 >의 성공 이후,

스파이크 리 감독의 테렌스 블렌차드에 대한 신뢰는
이듬해, 그의 새 작품인 < 정글 피버(Jungle Fever) >부터

전격적으로 테렌스 블렌차드에게 영화 전편의 스코어를 맡기게 한다.
그 뒤로 이어진 그 둘의 협업 목록은
< 말콤 X >, < 25시 >, < 블랙클랜스맨 >등

30여 년간 20여 편의 영화로 쭈욱 이어진다.

Malcolm's Theme - Terence Blanchard


영화 Malcolm X(1992)의 테마를 재구성한 연주 앨범이다.

영화음악과 재즈 연주가 만나는 지점에서

그의 신고전주의 재즈에 대한 애정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약관 스무 살에 하드밥의 명문인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 메신저스"에 합류하며

하드 밥의 문법과 흑인 음악의 윤리를 체득하며 발전해 나간 그의 음악은

재즈 전통을 영화음악으로 확장한다.
스파이크 리와의 30여 년간의 협업을 통해

미국 사회의 역사와 인종 문제를 해석하는 예술 언어임을 증명했다.
그의 작업들은 오케스트라의 대위법과 재즈의 즉흥성을 결합해,

미국의 상처를 품은 음향적 서사를 구축한다.


그는 영화 음악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오리지널 오페라 < Fire Shut Up in My Bones >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136년 역사상,

최초의 흑인 작곡가 작품으로 기록되며,
그의 신고전주의적 철학과 감각이 오페라라는 고전 양식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Peculiar Grace in Opera "Fire Shut Up In My Bones" - Ternece Blanchard


그의 행보는 신고전주의 재즈가 단지 과거의 양식을 복원하는

단편적인 재즈에 국한된 운동이 아니라,
미국 예술의 전통을 현재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는 하드 밥의 형식 속에서 자라났지만,

그 구조를 해체하지 않았다.
그 구조 안에서 인간의 감정, 사회의 균열, 공동체의 기억을

새로운 구조의 언어로 배치한다.
이것이 블랜차드의 음악이

‘보수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미래지향적 신고전주의로 평가되는 이유이다.

그의 작품은 재즈가 여전히 살아 있는 미국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재즈, 영화, 오페라, 오케스트라까지 확장된 그의 시도는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전통이 스스로를 확장해 가는 과정,
즉, 미국 예술의 가능성이 재즈라는 언어 안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테렌스 블란차드의 음악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윈턴 마살리스가 주창한 신고전주의적 철학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다.
그의 음악은 전통과 혁신의 두 축 위에서 호흡하며,

재즈를 넘어 미국 문화예술 전반이 공유하는 정서와 미학을 담아낸다.

하드 밥과 비밥으로 다져진 재즈의 토대 위에
영화와 오페라라는 전통적인 예술 형식을 새롭게 재해석하며
재즈가 현대 미국 음악의 핵심 언어로 융합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 과정에서 블란차드는 재즈를

무대예술, 영화 그리고 음악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종합예술로 확장시켰고,

그 자신은 이 시대 가장 미국적인 감성과 예술적 지성을 겸비한

진정한 거장으로 자리했다.


그의 트럼펫은 이제 재즈의 한 장르를 넘어,

미국 예술 그 자체를 증명하는 위대한 목소리로 남게 될 것이다.


In Time Of Need - Terence Blanc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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