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히는 것과 남는 것들

by HONG

퇴원도 금방 올 수 있을 거란 기대와 다르게 퇴원은 애초에 예상되었던 날에 비해 4~6일 정도 미뤄졌다.

그래도 나는 다음 퀘스트를 찾아다니는 RPG 게임의 모험자처럼 간호사 선생님이나 의사 선생님이 오시면 다음에 내가 할 일을 물어보기 바빴다.

머리는 언제 감을 수 있나요? 핀은 언제쯤 뺄까요? 실밥은 뽑으려면 조금 더 걸리겠죠?

내 귀찮은 질문에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대답해 주신 많은 의료진에게 다시 생각해도 존경심이 드는 순간이다.


머리에 핀을 뽑아주러 다른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머리에 핀을 세심하게 뽑아주시면서 "눈썹 위쪽으로 실밥은 아직 제거가 안 돼서 머리는 감으면 안 되겠네요"라고 다정하게 말씀해 주셨다.

겁먹은 것에 비해 핀을 빼는 일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새벽에는 몇 시간 간격으로 나의 혈압, 체온, 혈당과 간단한 피검사를 하기 때문에 사실 잠을 푹 잘 수는 없었다.

환자들의 수많은 예민함을 수없이 견뎌오신 탓인지 간호사 선생님들은 항상 친절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시며 가끔 다른 검사결과도 간단하게 알려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여전히 체온은 조금 높은 편이었지만 이틀이 넘어가자 식은땀을 흘린 뒤 상쾌해지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어 그래도 몸이 점점 회복되는 기분이 실질적으로 체감되어서 더욱더 힘이 났다.


삼일차에는 당부하검사를 위해서 전 날 12시부터 물까지 포함한 금식을 하느라 갈증과 허기가 심했는데,

다행히 검사시간이 오전으로 잡혀서 아침 일찍 검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항상 검사 전에 마셔야 하는 이상한 설탕물이 굉장히 찐득한 감기약 시럽 같은 맛이라 구역질이 났다.

뇌하수체 질환은 채혈과의 싸움이라는 말을 이전에 했던가, 당과부하 검사또한 설탕물을 마신뒤에 바로 채혈을 하고 그 뒤로 30분 후 채혈 또 그 뒤로 60분 후 채혈 마지막으로 120분쯤 채혈을 마친다.

검사 결과로 나의 종양이 기능을 하는 종양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검사 전만 해도 배고픔과 피곤함에 아무 생각 없이 검사를 받았지만 검사가 끝나고 어느 정도 잠이 깨니 막연한 긴장감이 찾아왔다. 행운이 마저 따라와 주길, 수치가 정상적이길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체력이 현저히 낮아진 것을 부쩍 많아진 잠으로 체감한다.

평소에 잠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평범한 편이었던 것 같은데, 병실에서 나는 잠깐만 기대면 바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기절하기 바빴다.

간호를 해주셨던 아버지도 내가 뒤돌아보면 곤히 자고 있다며 신기해하셨다.

사실 병원에서 빠른 시간을 보내려면 잠을 자는 게 제일 좋은 선택지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애초에 왼쪽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서 영상이나 책을 읽기도 힘들게 느껴졌다.

하지만 힘든 걸 나열하면 끝도 없다는 걸 알기에,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주질 않을 땐 잘 먹고 잘 자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내 몸이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찾아오는 개운함이 기분 좋았다.


계속된 채혈과 이상하리만치 나를 지배하는 배고픔, 화장실에서 소변량을 체크해야 하는 일.

간단하고 단순한 인간을 이루기 위한 것들, 회복을 위한 식욕과 수면욕이겠지.

비몽사몽 한 정신이 싫어 억지로 눈을 뜨고 있다 보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짐을 느낀다.

그래도 점점 나아져가고, 그 체감이 느껴지는 것에 감사하다.


요붕증이라는 소변량이 많아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소변량을 항상 체크해야만 했다.

소변량을 체크하고 난 뒤 빈 통을 아버지에게 줄 때면 항상 민망한 기분이 들었는데

아버지는 그래도 내가 소변통을 갖다 줄 때면 기분이 좋았다고 하셨다.

"넌 항상 어렸을 때부터 뭐든 혼자 해보려고 했었지" 민망해하는 내게 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어쩐지 빈정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질문을 툭 내던졌다. "아빠는 보호자 하는 게 힘들진 않아요?"

아버지는 예상도 못한 질문이었다는 듯 대답하셨다. "아빠는 지금 제일 즐거운데?"

딸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주는 게 즐거운 일이라니 아직까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 못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도움을 청하는 게 낯설고 힘들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부터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상황에 주어진 것도 있겠지만 내 성향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 그래서 이 병도 이만치 키워온 거겠지... 중간에 모든 걸 멈추고 내 몸을 챙기는 여유가 있었더라면,

미안해하는 아버지와 심란해하는 자신 사이에 막연한 조용함이 찾아왔다.

조용함은 간호사 선생님이 가져온 소식으로 금세 달아났다.

조금 있다 뇌하수체종양센터로 내려가서 교수님을 만나면 대망의 코패킹 뽑기 행사(?)가 이뤄진다며 조금 아플 거라고 웃으셨다.

당장 막혀있는 답답한 코가 해결된다는 소식에 아프다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마냥 기쁘지만 했다.

아프다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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