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에서 걸작들을 남겼다. 조각과 회화에 나타난 주인공 대부분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를 통해서 국가를 세우고 전쟁을 하며, 권력을 차지하거나 유지하는데 주도권을 가졌던 주체가 남성이었기 때문에 반영된 것이라고 추축 된다.
그런 시대성 상황에 의존해서 활동 통로를 찾았던 예술가에게는 권력으로부터 예술적 자유를 얻는 데 한계가 있었고, 권력과 동행해야 하는 숙명에 있었다. 따라서 권력이 요구하는 예술과 자신이 품고 있는 예술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었지만 외면적 권력표현에 내면적 영감을 얻거나 숨기는 이중적 방식으로 예술을 했던 것은 아닐까?
미켈란젤로가 권력과 동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다비드상>(1501-3)이었다. 그는 동성애의 도시로 유명한 피렌체를 지배해 온 메디치 가문의 군주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을 무찌른 피렌체 공화국을 찬양하는 남성 조각상 <다비드 상>을 만들었다.
성서 사무엘상 17절에 의하면 다비드(다윗)은 거대한 블레셋 장군인 골리앗과 싸운다. 골리앗 앞에서 무장도 하진 않은 다윗이 돌팔매로 적장을 쓰러트리고 자신의 검으로 참수한다. 조각상은 다윗의 강한 용기, 거대한 힘, 백전불굴의 정신을 가진 피렌체의 수호신으로 상징화됐다.
<다비드상>은 건장한 남자의 나체상으로 땡땡한 신체의 곡선, 터질 것 같은 손등의 핏줄, 허벅지근육 등의 소유자였다. 르네상스는 권위를 옷으로 감추고 비밀을 유지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 다비드와 같이 알몸, 맨몸, 근육, 맨살 등을 가진 신체 건강한 남성을 선호했다. 강한 신체상에는 권력자를 대변하는 권위와 위엄이 있고, 동시에 미켈란젤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남성에 대한 동경이 공존하고 있다.
메디치가가 복귀 후 <다비드 상>의 파괴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메디치가는 그 예술성을 인정하고 대신 피렌체 공화정부를 토벌한 메디치가를 찬양하기 위한 작품을 의뢰했다. 그리하여 메디치가문을 수호할 수 있는 조각상을 이탈리아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1500~71)에게 의뢰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수호신으로 신화를 모티브로 한 청동상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를 제작했다.
페르세우스는 매디치가문을 의미하고 그가 참수한 메두사의 머리는 피렌체 공화정부를 상징했다. 페르세우스(Perseus)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미케네 페르세우스 왕조 초대 국왕으로 고르고 세 자매 중 하나인 메두사를 무찌른 영웅이었다.
이 조각상에서도 페르세우스의 신체는 다비드상처럼 강한 근육, 미끄러운 신체, 벌거벗은 알몸, 강인한 신체의 소유자로 조각되었다. 예술가에게 동성애를 유발하는 남성은 <다비드 상>과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에서처럼 강한 신체적 미를 가진 영웅이어야 했던 것이다.
조각상으로 이상화된 남성은 회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에 초빙되어 성서와 관련된 회화를 그렸다. 연인관계였던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12 사도를 그릴 것을 명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이 너무나 거대하다고 판단하고 거기에 어울리도록 영웅적 남성이 등장하는 <아담의 탄생>(1511년), <노아의 방주>, <모세> 등을 그렸던 것이다.
그중에서 유명한 <아담의 탄생>은 신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창세기 속 성경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아담(히브리어: אָדָם)은 성서에서 신이 흙으로 자신을 닮게 창조한 최초의 인간이다. 그 이후 아담의 갈비뼈 중 하나로 이브를 창조했다.
<아담의 탄생>에서 신과 아담의 손가락 접촉은 창세기에서 신이 흙으로 아담을 만든 다음 코로 숨을 불어넣어 생명체로 만들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신을 하얀 의복을 입고 백발을 한 노인처럼 그렸고, 아담은 발가벗은 건장한 신체를 가진 남성으로 그렸다.
<아담의 탄생>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옷을 걸쳐 성별구별이 안 되는 신과 벌거벗은 육체를 가진 남성으로 그려진 아담이다. 신과 아담은 건장하고 화려한 신체, 튼튼한 근육질을 가진 역동적이고 화려한 신체의 소유자이다. 신과 아담의 신체는 미켈란젤로의 손에 의해서 신비화되었다.
그것을 종교가 아닌 예술가 마켈란젤로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미켈란젤로의 내면에 있는 남성상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아담의 탄생은 동성애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회화 속으로 스며들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면, <아담의 탄생>은 외면적으로 신과 아담이고, 내면적으로 자신과 사랑하는 미소년을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동성애를 암암리에 관조하고 즐겨왔던 미켈란젤로는 돈을 요구하거나 의도를 가진 미소년들과는 다른 소년을 소개받게 된다. 그가 바로 평생 연인으로 그의 곁에 남아있던 토마소였다. 미켈란젤로는 토마소의 탄탄한 육체, 세련된 자태, 고상한 품위, 밝은 지성, 예술에 대한 광기 등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1532년부터 토마소에게 드로잉 작품을 선물하면서 새로운 단계의 사랑으로 돌진한다. 티티오스가 레토 여신을 강간하려다 형벌을 받는 <티티오스의 형벌>(Punishment of Tityus), 제우스가 가장 아름다운 가니 메드를 강간하고 신에게 바치기 위해 독수리로 변장한 <가니 메드의 강간>(Rape of Ganymede, c), 피에톤이 태양의 전차를 운전하다 추락해 죽는 <피에톤의 추락>(Fall of Phaeton, c), 발가벗은 남자가 잠들다가 날개 달린 천사의 트럼펫 소리에 깨는 모습을 그린 <꿈>(The Dream) 등을 사랑의 징표로 선물했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 독수리에 빗댄 자신의 토마소에 대한 열정과 죄의식, 판타지, 엣스타시 등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남녀 간의 애로스의 끝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년 남성과 젊은 소년과의 만남에는 육체적이기보다는 정신적 사랑이 더욱 강렬하게 개입되었던 것이다.
신체적이며 생물학적인 러브가 아니라 정신적이며 플라토닉 러브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신체를 통해서 정신적 매력을 찾아내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 미켈란젤로의 남성애가 확실하게 정착한 것이다. 동성애를 유발하는 신체는 <티티오스의 형벌> 등에서 보이는 한계를 넘어 영원한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된다.
남성을 중심으로 한 미켈란젤로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신체를 성적 미학과 예술적 미학으로 승화시켰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인 신체의 역동성뿐만 아니라 내재화된 정신적 영원성을 변하지 않는 조각이나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토마소의 팔에 안겨 죽은 미켈란젤로의 사랑은 물리적 에로가 아니라 관념적인 에로로 정착되었다.
미켈란젤로는 ‘Ancora Imparo’(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라는 유연을 남겼다. 사후 로마에 묻혔다가 고향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무덤에 새겨진 라틴어 묘비에는 ‘조각가이자, 화가이자, 건축가’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일생 동안 소중하게 간직한 남성에 대한 사랑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위대한 작품을 창조되는 과정에서 깊은 고뇌를 한 예술가 미켈란젤로를 그린 영화 <고뇌와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년)>는 캐럴 리드가 감독을 했고, 배우 찰턴 헤스턴이 주인공 미켈란젤로를 연기했다. 교황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강제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둘의 애증 관계를 묘사했을 뿐이다.
또 다른 영화 <미켈란젤로>(Michelangelo–Infinito)는 엠마누엘라 임부치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2017년 9월 20일에 공개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인생을 따라가며 미켈란젤로의 자전적 독백, 역사적 사건 재연, 실제 작품 감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바티칸 박물관을 통해 빛나는 예술사를 약 2시간 정도 흩고 나오는 과정에서 예술과 성이라는 프레임에 통쾌하게 푹 빠져 광란적으로 즐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심신을 16세기 조각가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세운 베드로 대성당 광장(Piazza di San Pietro)의 아우라가 토마소의 여운처럼 감쌌다. 베르니니는 ‘광장 설계의 중심 주제를 균형미’로 했다고 전한다. 광장에서 기울지 않고 우뚝서있는 오벨리스크는 큰 잣대로 내 마음의 균형을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짜릿하게 비쳐온 역사의 서광은 내가 본 것들이 신과 인간, 이성과 동성, 남과 여, 하늘과 땅, 신체와 정신 등의 공존을 이야기했다는 듯이 공평하게 비췄다. 그것이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나 회화에서 나타난 성에는 불균형이나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내가 접한 예술은 성의 자유와 억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