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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저수지에 박힌 달이 얼었다 175

by 불량품들의 사계 Feb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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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 힌 달이 얼었다



                

날이 밝아도 마을은 어둡다. 신도시 재개발 발표 나기 전부터 마을 끝에 꼬부라진 집이 있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였다. 누가 봐도 폐허다. 담과 수풀에 가려져 기와지붕만 보인다. 담쟁이가 돌담을 감싸고 있다. 뒤뜰 호두나무에 까치집 하나, 둘, 셋......  호두를 주우러 집 앞을 지날 때마다 궁금했다. 대문 앞에 연탄재가 쌓여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뜻인데.


오늘은 연탄재를 발로 걷어차면서 대문을 열었다. 고개를 내밀었다. 해가 지지 않았는데 마당은 어두웠다. 흑백사진이었다. 헝클어진 파마머리 할머니가 마루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이고’ 나는 놀라 발을 멈추었다. 할머니는 대문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나마 새어드는 햇살로 오른쪽 얼굴과 어깨가 선명했다. 햇빛 한 올 받기 위해 마루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움푹 파인 눈과 마른 몸은 마치 송장에 옷을 걸쳐놓은 같았다. 마당을 덮은 눈 위에 새 발자국만 찍혀있었다. 밖에 연탄재는 언제 것일까. 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대문을 닫았다. 인기척에 까치는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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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내려오는 동안 엄마가 생각났다. 섬에서 혼자 티브를 켜놓고 잠든 엄마, 자식들이 사는 인천으로 모시고 와 같이 지냈다. 얼마 안 있다가 요양원 철제 침대에 누워있던 엄마, 종잇장 같은 입으로 숨을 쉬었다.

“집에 가고 싶어” 살가죽 위에 새겨진 수많은 길이 지워졌다. 옆 침대는 굳은 채 복도로 나간 뒤 비워져 돌아왔다. 치자 빛 들어오는 창문 아래 나는 눈물도 없이 엄마와 앉아 있었다. 말라버린 엄마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눌렀다. 손등 너머 아득히 깊은 곳으로 나비가 날아갔다.  젖가슴은 비바람에 깎인 무덤이었다.

살아남는 것은 짐일까, 죄일까.  

   

그믐달이 떴다. 저수지에 박힌 달이 얼었다. 물속이 어둡다. 떠도는 개들이 방지턱을 넘어간다. 오늘 같은 밤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붉은여우를 볼 것 같다. 사람들이 옷을 갈아입고  교회로 간다.  

나는 방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할까. 가까운 것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떠돌거나 이별이거나 죽음이었다.

촘촘하던 마을에 구멍이 숭숭 났다. 폭설에 수많은 나무가 꺾였다. 가로등도 고장 났다. 구멍 사이로 걷는 밤길이 무섭다. 빈집 벽에 ‘철거’라고 빨간 스프레이로 갈겨져 있다. 이왕이면 담벼락에 그라피티를 그리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을까.

뉴스를 보다가 술을 입안에 털었다. 노인들이 옷을 몇 겹 껴입고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새벽부터 줄을 서 있는데, 밥이 떨어졌단다. 단속 나온 경찰 발소리를 듣고 간판불 끄는 지하노래방 주인, 날마다 허우적대면 일을 배우다 급성 백혈병인 줄도 모르고 쓰러져버린 사회초년생, 죽은 아들을 보기 위해 남해안 어느 곳에서 서울까지 새벽에 한 달음 달려온 부모님. 나는 속눈썹을 닫았다. 아무리 나라가 나라를 위한다고 해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나는 이불을 돌돌 말고 소주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불안은 초승달만큼씩 자란다. TV 속에서 총알과 포탄과 드론이 터진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는 3년째 전쟁을 겪고 있다. 러시아에 파병된 총알받이 북한군인들, 청년들 목숨을 총알이 앗아가고 있다. 저들의 전쟁으로 나라 반이 넘게 물에 잠긴 파키스탄, 내전으로 자유와 목숨을 잃은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지구 곳곳에서 들려오던 소식들이 사라졌다. 어느 것 하나 경중을 둘 수 없는데 말이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청년들 팔다리와 목숨을 앗아간 총알이 떨어질 때마다 별똥으로 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사람들이 풀잎을 젖히고 별똥을 주우러 다니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잠이 안 와 오지랖 별명답게 말도 안 되는 별의별 상상을 했다.

나라 밖은 그렇다고 치고 나라 안은 왜 또 이 모양인가. 자영업자 다 죽어가는데. 요즈음 맛있는 것을 먹어도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여행을 같이 가고 싶은 사람 없다. 전에 들었던 노래가 흘러도 떠오르는 기억 없다. 문득 내가 제일 짠하다는 생각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정작 갈치 한 토막도 굽지 못한 검불인 내가 뭘 어쩌겠다고, 고작 TV 앞에서 욕이나 하고 앞에 나서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맞아야 팽그르 도는 팽이처럼 그나마 마을 밖이 시끄러워 귀를 기울인다. 답답해 벌떡 일어나 넥워머를 싸매고 밖으로 나갔다. 텃밭에 붉은여우 대신 고라니 발자국이 찍혀있다. 호두나무 아래 불침번을 서고 있는 눈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겨울 청년, 너라도 우리나라 지켜라. 믿을 놈 하나 없다.’

술기운에 꼬부라진 집과 엄마를 생각하다 너무 멀리 온 거 같다. 흰 산이 눈가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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