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또 삶 Jul 20. 2023

07.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을까...

결국은 한 번은 넘어야 한다.

 

 앞의 글들은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속시원히 써 내려갔다. 처음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못쓸 것 같았고... 주저주저하며 용기가 안 났었는데, 막상 써보니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과 함께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쓰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그 일에 대해 조금은 치유가 된다고 하는 말이 맞는구나!' 하면서 나름대로 그림도 그려가며 내가 나아지고 있구나를 느꼈는데... 이번 글을 쓰려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저미어서 쓰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나는 안다. 이 산도 넘어야 한다는 것을. 결국은 토해내야 한다는 것을... 결국, 그래 결국은 스스로 마주해야 그 시간에서 멈춰버린 어린아이에서 조금은 어른으로 커갈 수 있는 것을 말이다.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태평했을까... 아니! 무지했을까?


스무 살.

첫사랑이었다.


 나는 그의 세계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의 모든 것이 좋았고, 따라잡으려 하면 또 한걸음 멀어져 가는 그를 뒤쫓아가며 열심히 따라갔다.

.

.

.

 그렇다. 우려하던 그 일. 말로 꺼내기 힘든 그 일.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그날의 일에 대해 써보려 한다.

.

.

.

 아이가 생겨버렸다.

.

.

.

 그날도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생리 예정일이 다가왔는데 생리를 하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하나 사서 잠시 나와 화장실에서 테스트를 해보았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우선 빨리 그에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그다음엔 다시 카운터로 돌아왔다. 눈물이 주르륵 내렸다.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고, 알아차렸을 땐 너무 늦어버렸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 할 거 같아서 일하는 중이었지만 20분 뒤에 보기로 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잠시 볼 일이 있다고 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여느 때와 달리 아득했다. 주변 소음들과 스쳐가는 사람들은 모자이크 된 듯 뿌옇기만 했다. 그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그의 모습. 무슨 날벼락인가 싶은 그의 눈. 나를 토닥이던 떨리던 그의 손.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그의 품에서 엉엉 운 채, 나도 모르게 아이를 낳을 거라고 했다. 본능적이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혼란스럽고 정리가 안 된 와중에도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우선 나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였는지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라고 말하며 토닥여주었다. 우리는 그 근처에 있는 작은 산부인과로 가서 초음파를 보았다. 아주 작은 동그란 모양으로 빠르면 5주? 6주 정도 된 듯했다. 우리는 다음 날 조금 큰 병원을 가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우리가 갔던 곳은 산모들이 많이 있는 큰 병원이었다. 나는 못 갈 곳을 가는 사람처럼 얼어붙어서 그와 함께 들어갔다. 간단한 접수 기록을 하고 초조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나 어제처럼 초음파를 보았고, 결과는 똑같았다. 어제는 믿기지 않아 사진을 받진 않고 임신 여부만 들었다면 이번엔 초음파 사진도 같이 받았다. 우리가 스무 살, 스물세 살인 어린 나이었기에 간호사들의 눈초리도 안 좋았다. 그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죄인같이 느껴졌다.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며 밖으로 나왔다.


그. 런. 데.


 하루 사이에 그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자기 어머니께 얘기했더니 자기도 밑에 동생이 있었는데 지우셨다며 어머니가 지웠으면 좋겠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도 그러길 원했다. 나를 설득하려고 애절히 몸부림치는 그를 보고 있자니... 화가 나고 서러웠다. 나는 부모님께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그 충격으로 또 입원을 하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고, 아빠에겐 더더욱 얘기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자려고 방바닥에 누웠는데... 이대로 땅 속에 묻혀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아무 고통도 느낌도 없이 땅 속에 그냥 스며들어가 없어졌으면 했다.


 다음 날, 그를 또 만났다. 우리는 골목길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방법이 없겠다 싶었는지 갑자기 나에게 인도 여행에 같이 갔던 여자 동기 중 한 명과 잠자리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갑자기... 난 또 충격을 받은 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었다. 무릎을 꿇었었나? 기억이 흐리다... 나는 그 자리를 피하며 무작정 어딘가로 세차게 걸어갔다. 끼고 있던 커플링도 차도에 던져버렸다. 시장통 옆의 도로였는데 그가 뒤쫓아오다가 그 반지를 주섬주섬 주우며 나를 멈춰 세웠다.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질리게 만든 다음 아이를 지우게 하려는 의도인 걸까? 아니면 갑작스럽게 자기 마음 편하자고 하는 양심고백? 나는 기가 막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구냐며 물었더니 한국에 남자친구가 있는 살인가 많은 누나였다. 잊히지 않는 그 여자의 이름. 청순하고 하얀 피부에 키가 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를 만나기 전 군대 가기 전에도 그 누나와 잤다고 했다. 자신의 첫 경험이 그 누나라며... 차라리 그가 그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았을까?... 잘 모르겠다... 지독한 인연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나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돈도 직업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내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게다가 남자친구도 반대를 하는데... 심지어 그의 부모도 반대를 하는데... 나의 잘못이니 내가 감당해야 하고... 어렵지만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여자 부장님께만 조용히 사정을 말하고 휴가 아닌 휴가를 얻었다. 그 여자 부장님은 40대 후반의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시는 분이었는데 나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주셨다. 역시나 나의 상황에서 낳아서 기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셨다.


 나는 그와 함께 그가 알아본 병원으로 갔다. 간호사는 평온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었다. 바지를 병원 치마로 갈아입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재차 물으며 안내해 주시는 대로 따랐다. 수술실은 모든 것이 차가웠다. 의자도 조명도 의료용품들도 분위기도 온도도... 그 차가움이 폐부를 찔렀다. 하나, 둘, 셋 하면 잠드실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들었고, 일어나니 병원 침대 위였다. 그가 밖에서 기다리다가 내 옆으로 와서 앉은 다음,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기다리면서 본 옆 침대 여자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 여자도 나와 똑같았는데 혼자 수술받으러 온 듯해 보였고 의연하게 갔다며...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며 나를 위로해주려고 하는 말 같았다. 퇴원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그와 함께 수납하는 곳을 나오는데, 그가 어머니께 받은 현금 20만 원을 가방에서 꺼냈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나는 그 돈을 보자 죄책감에 무겁게. 아주 무겁게.. 짓눌렸다.


 그가 나를 부축하며 그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분식집을 운영하셔서 퇴근이 늦으셨는데 그 시간 동안 푹 쉬고 어머니께서 끓여놓으신 미역국을 먹으라고 했다. 미역국을 먹고 그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쉬었다. 방법이 없었다. 나의 잘못, 그의 잘못, 감수해야지... 감당해야지...


그리고 헤어졌으면 좋았을걸... 이건 사랑이 아니야. 인연이 아니야. 하며 탁 끊어내 버릴걸...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나에게 상처 준 그가 밉기도 하면서 같은 아픔을 공유한 동지였고, 사랑의 깊이도 더 깊어져 있었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끊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바람과 배신이 의심이 되었고, 의심은 더욱 커져 올가미가 되었고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도 똑같았을 것이다. 상처를 준 나에게 또 상처를 주는 게 미안했을 것이고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미 헤어지자고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정말 바보 같다.

그런데 그땐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이 아픔들을 욱여넣어가며 지냈다. 겉으론 멀쩡한 척,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그에게만 내 모습을 보이며 괴롭혔다. 배신감은 점점 깊어져 꿈속에서 까지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고, 소리를 치며 깨기도 했다. 자유로운 영혼인 그에게 나는 올가미였을 것이다. 그가 동기들을 만난다고 하면 또 의심이 되었고, 상대가 여자라면 더더욱 싫었다. 한번 깨진 틈으로 생긴 균열은 점점 더 증폭되어 갔다.


 어느 날은 그의 예전 수첩 사이에서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툭 떨어진 사진을 짚어 들었는데 처음엔 무슨 사진인지 몰랐다. 화질이 좋지 않은 필름카메라로 찍어서 그런가? 아니면 어두워서 그런가 한눈에 무슨 사진인지 들어오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떤 어두운 공간이었고 티브이와 거울이 찍힌 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직감이 좋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사진이냐고 물어보니, 그 여자와 함께 잔 공간에서 찍은 거라고 했다. 사진 예술을 하니 뭐든 찍어 놓는 건가? 도대체가 그들의 사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여전히 보관하고 있다니... 내가 이상한 건지, 그가 이상한 건지 판단이 안되었다. 다시 배신감이 올라와 그 사진을 박박 찢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에 대한 죄책감은 더욱더 깊어져갔다. 아이를 지우고 나서 평생 그 아이에게 미안해하면서 살겠다 다짐했다. 웃고 있어도 미안해하며 웃을 것이고, 평생 속죄하며 살겠다 생각했다. 죄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그 아이가 꿈속에서 나에게 활짝 웃어주는 꿈을 꿨다. 꿈에서 깨고 나서 아린 가슴을 움켜쥐며 흐느껴 울었다. 내가 살아있는 게 미안했다. 모든 것이 다 나의 잘못 같았다. 나는 나를 용서하면 안 될 것 같았고 큰 바윗덩어리가 나의 온몸을 짓눌렀다.


 멈췄어야 했다. 브레이크를 걸어도 진작에 걸었어야 했다.


 우리는 4년의 시간을 더 같이 보냈고, 그중 1년은 병원에서 함께 보냈다.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 직전에 그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다음 날 외국인 여자와 언어교환을 하러 간다고 했다. 나는 또 의심부터 생겨 가지 말라고 말렸다. 공부한다는데 아무렇지 않게 '그래 알겠어' 하면 좋겠지만 그게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불신은 도저히 끝맺음이란 게 없었다. 가족들에게 조금 더 기댔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 지냈기에 가족들도 나의 상황을 몰랐다. 그에게 몇 번의 자살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 그도 어린 나이인데... 뭘 어찌할 수 없었겠지... 우리 둘 다 방법을 몰랐으니...


 어디에서 자살 경험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무겁고 조심스럽고 힘든 내용... 나는 그 트라우마에서 생존한 생존자이다. 아니 이런 표현도 나에겐 과분한 것 같다. 덤으로 사는 인생. 그게 맞겠다.


무겁고 힘든 이야기를 이렇게 꺼낸 너에게
정말 용기 있었다고 얘기해주고 싶어.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고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디에도 얘기하기 힘들었을 거야...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상처는 상처야...
조금씩 잊히고 생각나고 잊히고 생각나고를 반복했을 테지...
괴로웠겠다.
죄책감에 많이 고통스러웠겠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거잖아...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야.
너무 너를 끝으로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너무 소중한 사람이야.
너를 스스로 괴롭히면서 스스로에게 벌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네가 어떤 잘못을 했어도,
이건 얘기해주고 싶어.
"괜찮아... 모든 게 다 괜찮아..."
이제는 네 스스로 용서를 해도 되지 않을까?
충분히 아파하고 괴로워했잖아...
완전히 그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또 그 벌을 계속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가혹하잖아...
이제 한번 말해봐 봐.

"괜찮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다 괜찮다."

이전 07화 06. 불면과의 싸움, 마음 병원을 찾은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