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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쥐 Sep 28. 2024

지랄 맞은 DNA

몇 해 전 여름의 일이다.

사촌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나 "너희도 그럴 때 있어? 난 가끔 내 속에 모래가 섞인 물컵이 하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평소에는 물이 잠잠해서 컵의 맨 밑바닥에 있는 모래알갱이들이 그냥 가라앉아 있는 거지.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한 번 섞이기 시작하면, 마치 누군가 젓가락으로 그 물을 빠르게 휘젓는 것처럼 물과 모래알갱이가 막 섞이면서 올라오는 느낌이 드는 거야. 한마디로 결국 흙탕물이 되면서 쓴 물이 올라오는 거지. "


사촌 "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미리미리 정신과 상담받는 중이야."


나 "엥? 진짜?"


사촌 "외국에선 상담받는 게 흠도 아니고. 나는 따로 시간을 내서 가기는 그래서 영상으로 가끔 상담해."


똑똑하고 명석한 사촌도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니. 한편으론 충격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DNA가 할아버지를 닮았나? 집요하군.)


아마 이모가 들으면 기함을 할 테다.

이모 또한 할아버지의 DNA가 피해 가진 않았는지 강박증이 좀 있다. 문제는 그 강박이 내 사촌을 향해있다.

통금은 물론, 약속한 시간에서 2분만 지나도 이모의 걱정은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결국 이모의 짜증과 불안은 오롯이 사촌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되곤 했다.


언젠가 이모부는 이모의 강박증에 대해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이모부 "야, 너희 이모 2분만 늦어도 헬리콥터 띄울걸?"


예전에 미국에 살던 이모집에 2주 정도 지내며 미국 여행을 했던 적이 있다.

당시 고3이던 막내를 제외한 둘째와 나는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


우리 집 둘째는 상당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데 그날따라 이모가 살던 동네 근처를 산책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저녁 7시만 되면 문을 닫고 모두가 집에 있어야 하는 이모의 성미에 둘째의 자유로운 영혼은 그저 성가신 애물단지였다.


이모 "미국에선 총도 소지 가능해서 총 맞을 수도 있어. 둘째 지금 어디라니?"


나 "에휴, 알았어. 내가 전화해 볼게."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둘째는 전화를 받았다.


나 "(속닥거리며)야! 빨리 와. 이모 성격 모르냐?"


둘째 "알겠어. 지금 가."


그 당시 사촌은 반은 포기 한채, '또 시작이군'이라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자유로운 영혼과 함께 빠른 눈치를 장착한 둘째는 얼른 비행기 표를 바꿔서 먼저 도망가버렸다.


갑자기 티켓을 바꾼 둘째를 공항에 데려다주던 그날도 이모와 사촌은 싸웠다.

공항 문을 나서는 둘째를 쳐다봤다. 그 홀가분한 표정이란!  

그래도 난 아직 미국을 더 구경하고 가겠다며 버텼다.


과연 그건 좋은 선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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