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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쥐 Sep 14. 2024

옷깃이 흔들린다고  온몸이 흔들리면

나의 영악한 할아버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기엔 사람사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잘 파악한다.

'그 양반이 속은 아주 널널~하다니까.'라는 아빠의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어제는 요양사분이 와 있는데도 한바탕 난리를 쳤다.

그리고 이 난리의 시작과 끝은 항상 할머니를 향해 있다. 나는 요양사분이 나간 뒤 할아버지와 한 판 붙었다. 

할아버지는 발작버튼이 눌리는 순간, 주체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처음에는 조용히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다가도 점점 자신이 말하는 내용 자체에 분노가 커지고 결국 터져버리는 식이다.


막내의 말처럼 할아버지는 '바람에 그저 옷깃이 흔들릴 뿐인데 온몸이 흔들리는 사람'이 되었다.

총명함은 빛을 바란 지 오래고 이미 말라버린 육체에는 살고자 하는 악다구니만 가득한 노인이 보였다.

사실 이쯤 되니 죽음이 자신에게 언제라도 찾아올까 두려워 그때마다 발작하듯 우리에게 표출하는 걸로 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할아버지와 다툰 뒤, 역시나 우리가 예상했던 대사 그대로를 나에게 했다.


엄마 "할아버지한테 가서 사과드려. 아무리 그래도 네가 손녀인데 잘못했어."


나 "나한테 그런 말 할 거면 말 시키지 마. 할아버지가 엄마랑 할머니한테 사과하면 생각해 볼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말 해봤자 시끄럽기만 할 거라고 판단했는지 소파에 앉아 묵주기도를 드릴 뿐이다.

성경에도 자식을 노여워하게 하지 말라는데 우리 엄마는 피멍 들어가는 우리 가슴에는 쌀 한 톨만큼의 관심도 없어 보인다.


할아버지와 그렇게 한 판 하고 나서 속이 상해 막내와 드라이브를 나갔다. 그래봤자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는 게 전부지만.


차에서 훌쩍거리는 나를 위로하는 속 깊은 막내.


막내 "엄마가 환자인 것도 알고 원래 그런 사람인 것도 알아서.. 기대하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할아버지보다 엄마한테 더 화가 나지?"


나 "응, 맞아. 넌 안 속상해?"


막내 "나도 기대 접었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쉽진 않지."


나 "내가 볼 땐 너도 좀 울어야 해. 내 앞에서라도 울어."


막내 "난 이런 걸로 감정소비하고 싶지 않아."


내 속을 한 번에 꿰뚫어 보는 막내의 혜안은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나한테 저런 위로를 해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망을 쌓고 기대를 접어 눌러야 했을까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다.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 <참 괜찮은 태도>, 박지현 -

기대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실낱같은 희망 한 가닥이라도 잡고 싶은 내 마음. 그래서 결국 상처받고 마는 내 마음. 함부로 상처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가족들은 핏줄이란 이유만으로 내 마음에 어떤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들어온다.


어제는 별사탕 같은 하루를 노래하고 오늘은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는 나는 갈 길이 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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