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의 뒷모습 산문 연재] 살아가는 우리들
매일 그곳에 당신이 있었으니까. 그날도 당신이 있을 거라 믿었다. 나에게는 당연히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당연함은 오늘의 평범한 나의 일상을 완성시킨다. 나는 누군가가 당연하게 존재하고 있음에 대한 결과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좋은 점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만난다는 점이다. 방송작가로 일을 하며 다양한, 꽤 넓은 범위의 영역의 사람들을 만났던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한다고 해도 타인에게는 언제나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삶.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이다.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과 같은 곳에 출근하거나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는 일은 자주 부정적이거나 무료한 일들로 치부되곤 하지만 사실 그 반복이 비로소 하나의 진득한 이야기를 완성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때로 이토록 당연한 것들이 홀연히 사라지거나 또는 어그러진 경우의 삶을 만난다. 그런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 과정은 꽤 어렵고 슬픈 과정을 지나와야 한다.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소중한 인연이 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동복지를 위해 힘써 왔다. 그녀의 꿈은 버려지는 아이들이 없는 세상. 누군가 아기를 포기했다고 해도 엄마 혼자 그 짐을 다 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세상. 서로가 손가락질하지 않고 누군가는 품어주고, 품어주는 것이 어렵다면 마음으로, 진심으로 응원의 메시지들이 오가는 세상을 꿈꿨다.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어린이 복지 재단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는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센터에 있는 아이들을 만난 뒤,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하루를 온전히 채운다. 그녀가 이런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아이들은 곧 그녀의 꿈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일상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아이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했던 평범한 일상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하루를 채웠었다. 그러나 남편과의 불화가 심해졌고 아이까지 아프면서 그녀의 평범한 일상에는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병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녀의 일상은 무너졌고 매일 반복하는 일이 바뀌었다. 아이와 함께 가는 곳은 어린이집이 아닌 병원이 됐고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던 가족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그녀를 속박하는 이름이 됐다. 그녀는 무너져갔다.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그녀는 다시 발버둥을 쳤지만 끝내 그녀는 해낼 수 없었고 아이와 남편을 한꺼번에 잃은 그녀의 삶은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사랑과 안정을, 일상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지금의 일에 집중하고 매달리다가 자신이 일상으로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이곳에서 차근차근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지금은 방송국에 나와 자신이 속한 재단을 소개할 만큼 입지를 든든히 하게 됐다. 행복하다,라는 말은 아직 그녀에게 사치였지만 그녀는 행복을 그리 큰 범위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내가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방송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함께 고민하면서부터였다. 그녀의 삶을 보통의 삶이라고 소개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말이 길어졌다. 그녀의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자식을 잃은, 남편과 헤어진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직 오늘을 즐기며 오늘의 아이들을 생각할 뿐이었다. 방송은 여느 재단 홍보 프로그램 같이 상투적으로 끝났지만 그녀와의 인연은 이어졌고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그래도요. 가끔은 너무 힘드실 것 같은데 극복은 어떻게 하세요?" 그녀는 대답했다. "가끔 힘들긴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 아이가 생각나요. 매일 힘들어요. 그런데요, 그냥 그 힘듦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편해요. 원래 있는 응어리구나, 하면 누구를 향한 원망도 없어요. 매일 반복하는 오늘이 그저 다시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녀는 살아갔다.
마치 이런 것이다. 손을 닦기 위해 화장실에 간다. 수도꼭지를 틀고 물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아니, 기다림도 없이 수도꼭지를 여는 순간 어떤 인식을 할 겨를도 없이 물이 나오니까. 우리는 손을 닦는다. 이전에 묻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오염된 것들이 씻겨 나간다. 이 모든 순간을 나는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손을 닦는 건 필요한 일.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 따뜻한 물이 나온다면 그저 조금 더 편하다고 느끼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이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깨끗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쳤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수도꼭지를 통해 나오는 물은 대부분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았던 그 순간에도 너는 그저 나에게 흘러왔다. 나를 깨끗하게 했다. 그렇게 쏟아내고 또다시 어딘가로 흘러가기를 반복했다. 이 모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
그녀의 평범한 일상은 잠시 배반을 당했다. 물론 그녀가 그 배반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거의 그렇지 않고 그것만이 원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녀가 원하던 방향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일상적이었던 모든 순간에 대한 당연함에게 잠시 배반을 당했고 그때 삶의 무언가를 어렴풋 깨달았다. 그리고 또다시 그 깨달음을 흘려보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랑하지 않았다. 그 어떤 순간도 자신의 공로로 인정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당연함과 누군가의 평범한 그 자리와 그 존재가 거기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숨 쉬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삶에서 마주한 큰 위기에, 그 위기로 남겨진 응어리에 지금도 때로는 괴롭지만 그녀는 결코 누구를 탓하지 않는다. 신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저 당연하게 여겼던 자신의 안일함에 아픔을 느낄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가. 왜 나만, 왜 나에게만 이라고 쏟아부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니까, 잠시 동안만큼은 괜찮아지니까.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한다. 콸콸 맑은 물로 우리 집 세면대에 차 오르는 물이 오늘도 우리를 배반하지 않았기에 당연한 일이 됐을 뿐이라는 걸 알아차린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변명은 필요 없다. 나의 일상을 지탱해주고 있는 수도꼭지여 흐르는 물이여, 그저 고맙다.
산문 연재는 계속됩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쓸모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