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수업 가는 길은 언제나 경쾌하면서도 차분한 발걸음으로 걷게 된다. 걸음에 맞춰 풀렁풀렁한 하렘팬츠의 보드라운 면이 기분 좋게 다리에 닿는다. 내가 좋아하는 수업 시간대는 바로 주말 오전이다. 직장인의 운명으로 보통 오전 시간은 꼼짝없이 사무실에 묶여있어야 해서일까, 괜히 오전의 햇살은 어딘가 귀엽고 앙증맞다. 게다가 주말 오전이라니. 요가 수업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서도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며 흘려보냈을 시간이다. 아침부터 침대의 유혹을 이겨내고 부지런히 수련하러 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요가원에 들어서면 큰 통창 밖으로 공원의 모습이 한가득 들어온다. 내가 다니는 요가원은 공원 한가운데에 있어 봄엔 벚꽃이, 여름엔 녹음이, 가을엔 단풍이, 겨울엔 흰 눈이 요가원의 한 벽을 꾸며준다. 지난번 눈이 많이 왔던 날. 그다음 날 참석한 요가 수업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속에 있는 듯했다. 일부러 풍경이 잘 보이는 통창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 자리는 인기가 많아 앉기 어려운 편인데 운이 좋았다.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다. 그렇게 곁 눈으로 들어오는 고요한 순간을 더 깊이 더 찬찬히 들이마셨다.
눈 내린 다음 날의 요가원
난 수업에 가는 것만으로 설렐 만큼 이렇게 요가를 좋아하지만 아쉽게도 잘하진 못한다. 요가에는 일명 '요수저'가 따로 있다. 내가 만든 단어긴 하지만 이것만큼 이들을 잘 표현할 말이 없다. 바로 태어나길 유연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다.
초중고 학창 시절 체력장을 하면 다른 종목에서는 늘 1,2등급을 달성했지만 유연성 테스트 앞에서는 늘 작아졌다. 1cm가 뭐야, 1mm라도 더 뻗어내고 싶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애꿎은 아킬레스건만 주물렀다. 늘어나라 팔, 자라나라 유연성. 어떤 친구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냥 수-욱하고 내려가던데 나는 키가 작아 다리가 짧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파들파들 떨면서 어떻게든 손가락 끝 살이라도 보태서 밀어보려고 애를 썼다.
아킬레스건 요법이 정말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난 지금도 여전히 요가원 매트에 앉으면 가장 먼저 아킬레스건을 주무르고 있다. 늘어나라 햄스트링, 자라나라 유연성! 간절하게 주물러 보았지만 여전히 다운독 자세를 할 때엔 무릎도 잘 안 펴지고 발 뒤꿈치도 닿지 않는다. 아르다 우타나사나 자세를 할 때엔 허리도 반듯하지 못하다. 하지만 난 이런 내 몸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게 바로 요가의 매력이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들숨과 날숨, 작은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느끼며.
(좌)다운독 (우)아르다 우타나사나
요가원에는 대부분 거울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를 엄격히 재단할 수도 없고 타인과 날 비교할 수도 없다. 갈 곳 없는 정신은 자연스레 내면으로 흘러들어온다. 나만 느낄 수 있는 호흡과 자극이 요가가 주는 유일한 답이다. 조금 힘든 자세가 오더라도 괜찮다. 허벅지와 복부의 아우성을 깊은 호흡으로 살살 타이르며 그 고통 속에 잠시 머무른다. '엇, 선생님 이건 그래도 너무 힘든데요?'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올 즈음 선생님은 어떻게 아셨는지 '다 지나가요-'라며 우리를 다독인다. 맞다. 이 고통이 정신을 꽉 잡아주는 생의 감각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날숨에 조금 더 깊은 자세로 내려가본다.
수련의 마무리는 나마스떼. 다 같이 합장을 한 채 선생님에게도, 옆 매트 회원님에게도 간단히 목례를 한다. 처음엔 이 말이 낯설어 입만 뻥긋거렸는데 한번 말하고 나니 진한 울림이 있었다. 간단한 인사말이지만 내재된 뜻은 수련의 여운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경배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함께 수련한 서로의 내면을 두드리는 따뜻한 격려. 요가에서 누가 누구보다 더 많이 숙이고 더 많이 꺾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린 내 안의 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요가의 상쾌하고 잔잔한 마음이 여러분에게도 충분히 스며든 것 같다. 그렇다면 몸을 움직여 진짜 요가를 할 차례이다. 요가원에 등록하려 알아보는데 갑자기 생소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하타? 아쉬탕가? 빈야사? 이게 다 뭐람. 이 세 가지는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요가의 장르다. 요가의 기원이 오래되다 보니 장르도 여러 가지다. 어떤 스승에게서 전수받았는지, 어떤 스타일로 가르침을 전수하는지 등에 따라 요가 장르가 나뉜다.
먼저 하타 요가는 긴 호흡으로 한 자세를 유지하는 기본기에 충실한 요가이다. 짧게는 3분, 길게는 15분까지도 유지한다. 느린 속도를 가져가기 때문에 내 몸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명상에 적합하다. 또한 오래 같은 자세를 지속하다 보니 자극이 심해지기도 하는데 이를 묵묵히 버틴다는 점에서 정신 수련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된다. 멋진 말로 포장하긴 했지만 어쩔 땐 고문받는 듯한 기분도 든다.
아쉬탕가 요가는 'Asta(8)+Anga(가지)'의 합성어로 인간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8가지 길이라는 의미이다. 도덕적 규칙(야마), 지켜야 할 것들(니야마), 자세(아사나), 호흡수련(프라나야마), 감각 제어(프라트야하라), 집중(다라나), 명상(디야나), 깨달음(사마디)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쉬탕가 요가의 특징은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정해진 시퀀스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시퀀스, 호흡수, 수련 단계를 갖고 있어 엄격하다는 특징이 있다. 시퀀스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아 초보자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빈야사 요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다. 하타와 아쉬탕가의 중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빈야사의 특징은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는 점이다. 흐름이 끊기지 않고 앞선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자세로 넘어가며 어느새 전신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타보다 빠른 템포에 연속성이 있다 보니 요가이지만 리드미컬한 매력이 있다. 동작 하나하나만 놓고 볼 때에는 그렇게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 수련이 끝날 때가 되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정말 요가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막 나온듯한 기분이 든다. 목은 길어졌고 어깨는 펼쳐졌다. 종아리에 묵직하게 들어차있던 부종도 말끔히 내려갔다. 한결 가벼워진 몸에 코 끝에 닿는 공기를 가득 채워본다. 이러다 두둥실 떠오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유연하진 않지만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으니 이걸로 충분하다. 다시 한번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