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집짓기
“큰딸,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꼭 눈 쌓인 감 사진 찍어”
건축에서 겨울은 피하고 싶은 계절이다. 추위도 추위지만, 건축을 하다 보면 물이 은근히 많이 쓰이는데 한겨울에는 꽁꽁 얼어버리니 그렇다고 한다. “겨울 전에는 공사가 끝나서 따뜻한 신축에서 보낼 줄 알았지 “ 라며 엄마는 날이 급격히 추워진 지금, 외관이 완성되어 인테리어 중심으로 실내에서 작업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건축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사 개월에도 짓고, 삼 개월에도 짓는데 엄마는 사계절을 다 만난 것 같아. 작년 겨울이 끝날쯤 시작해서 인테리어까지 하면 올해 겨울이 끝날 것 같으니. “ 엄마는 직영은 역시 고생스럽다는 하소연과 함께 그래도 모든 계절을 만난 건 좋은 일이었다고 했다. 이 말이 이해가 안 갔는데, 첫눈과 함께 경험한 천안의 겨울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아빠차로 천안에 가는 길, 다음 주 도장 작업 일정, 서울에 타일 고르러 가는 날을 언제로 할지, 옥상에 설치할 난간을 보냈다는데 잘 오고 있을지 등 부모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가는 길 항상 코스처럼 들리는 대형마트에 올 때쯤 눈을 떴는데 세상에,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마트에서 한참을 고르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데, 중학교 정도로 보이는 아이 둘이 들어왔다. 굴리고 온 눈덩이를 마트 주변 어디에 놓을지 누나에게 물어보는 동생과, 모자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누나가 고민 끝에 귤을 한 박스 사서 갔는데 정감 있는 모습이라 기억에 남았다. 눈이 오니 피하기는 해야겠는데 맞기는 즐겁고,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며 차까지 쪼르르 뛰어서 다시 출발했다.
우리 집으로부터 차로 3분 정도 거리에서부터 길이 얇아지는데 이 구간에서 실제로 차가 뒤집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짧은 고민 끝에 걸어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옷들과 먹을 것을 챙겨서 눈길을 걸었다. “옛날에 피난 갈 때는 도착지도 없이 하염없이 눈길이든 빗길이든 걸었을 것 아냐” 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도란도란 나누다 보니 저만치 보이는 집이 어느 때보다 아늑해 보였다.
서울에서는 동기들과 구내식당에서 아이폰 화면으로 눈 내리는 걸 봤는데, 천안에서는 그 눈이 내 머리와 가방에 소복하게 내려앉아 그 존재감을 인지시켜줬다. 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는데 사진에서나 본 것 같은 겨울 풍경 안에 있는 느낌이 생소하지만 좋았다.
자려고 누웠는데, 아빠가 내일 아침에 꼭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그래야 눈 모자를 쓴 감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새벽에 구경하는 눈 쌓인 감이라니! 생각만 해도 귀여웠다. 동시에 수많은 눈 온 뒤 풍경 속에서 감에 주목할만한 사람이 아빠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엄마에게 감을 따줬다는 아빠다웠다.
다음날 온통 흰색으로 덮인 광덕산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겨울 그 자체였다. 감은 상상보다 더 귀여웠고, 겨울의 맑은 공기는 잠을 기분 좋게 깨워줬다. 집 옥상에 올라가 광덕산 풍경을 구경하고, 구석구석 사진도 찍고 난 뒤부터는 거실에 앉아 해가 들었다 사라졌다 하는 걸 구경했다. 그러면서 사계절을 다 만나 좋았다는 건, 건축 덕분에 천안에 발 묶여 계절이 오고 가는 걸 하염없이 만끽할 수 있었다는 말이었구나 싶었다.
마음이 서울에서보다 훨씬 느슨해지고 계절이 흘러가는 걸 체감할 수 있는 곳, 오랜만에 방문한 천안집에서 서울에서와 다른 종류의 쉼을 가지고 나니 잠시 쉬었던 글을 이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