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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기준과 가치관, 방어기제의 수정

by 에이프럴

수업시간에 늦어서 서둘러 탈의실로 들어가니 영순 씨 뒷모습이 보였다.

기나긴 추석연휴 후에 보는 영순씨는 밝은 오렌지색으로 염색을 하고 파마길이도 훨씬 짧아져 있었다.

영순씨는 늘 같이 붙어 다니는 단짝이랑 한창 얘기하다가 나를 의식한 듯 대화를 중단했고

나도 영순씨를 외면한 채 얼른 옷을 갈아입고 교실로 들어갔다.


한 달 전쯤 일이었다.

라인댄스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나보다 5살이 많은 영순씨와는 라인댄스 초급반에서 2년을 함께 춤춰 왔던 터라 다시 만난

중급반에서도 서로 예의를 갖추며 지냈다.


그날도 중급반의 새로운 곡에 어려운 스텝을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익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늘 내 뒷자리에서 춤추는 영순씨가 내 뒤에서 내 팔을 붙잡고 앞으로 밀면서

"여기에 서서 해라!"

하는 게 아닌가?

'엥? 이게 무슨 의미야?'

나는 처음에 그 행동과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다음 수업시간에도 또 나를 제압하듯 꽉 잡고 원래 내가 서 있던 자리로 나를 끌고 갔다.

그리고선

"정신 사나워 죽겠다."

하는 것이었다.


라인댄스는 줄을 세워 추는 춤이라 해서 라인댄스라 부른다.

우리 학원 라인 댄스반도 앞 뒤 옆사람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4~5줄로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곡의 스텝에 따라 움직이는 반경이 다른데 그 크기는 사람의 성격과 스타일에 따라

차이가 난다.

평소 성격이 활달하고 시원한 사람은 스텝도 성큼성큼 크게 움직여 사용하는 면적이 넓고

조용하고 소심한 사람은 그 크기가 좁았다.


내가 2년 동안 지켜본 순씨는 춤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쭈뼛쭈뼛한 자세와 로봇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곤 했는데

그런 영순씨이기에 당연히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았고 동작을 크게 하는 타입인 내게 자기 영역을 크게 침범당해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무례한 영순씨에게 몹시 화가 나 지금까지 말을 섞지 않고 있다.


내가 평소 생각하는 기준과 가치관은 아주 큰 피해가 아니라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서로 피해를 주기도 받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그 과정 속에서 서로 조금씩 양보와 이해, 배려를 하면서 사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100퍼센트 완벽하게 살 수가 있을까?


춤추다 보면 자기 자리에서 좀 벗어날 수도 있고 서로 좀 부딪힐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럴 때 가볍게 웃고 지나가고, 어쩌다 신입회원의 발에 밟혀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그래서 영순씨가 하는 말과 행동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내 기준과 가치관만이 유일하게 옳다고 믿어온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영순씨같이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조그마한 피해도 주지 않고 작은 피해도 보기 싫은 개인주의 성향의 사람, 그 사람이 영순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영순씨는 영순씨만의 기준과 가치관이 있고

나는 나만의 것이 있는 것이다.

누가 옳고 틀린 것은 없다.

그래도 상대가 불편하다면 내 기준과 가치관을 수정할 수도 있다.

그것이 너와 내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내일 학원에서 영순씨를 만나면 내가 움직임이 커서 불편했냐고 물어보고 그 크기를 조금 줄여보려 노력하겠다고 말해야겠다.

그리고 정신 사납다는 표현은 좀 불편했다고 방어기제도 수정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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