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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가끔 반창고가 필요하다

상처를 이기는 언어

by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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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통에 든 그릇을 박박 닦는데 눈앞에 참치캔이 신경을 자극합니다.


'그냥 버릴까... 아니, 깨끗이 씻으면 벌레도 안 생기고 분리수거하시는 분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참치캔을 야무지게 붙잡고 수세미 쥔 오른손을 넣어 쓱쓱 문지르는데 검지손가락 첫 번째 마디가 뜨끔합니다. 순간 꽤 깊이 베었음을 직감하지요. 엄지로 검지를 꽉 말아쥔 채 반창고를 뜯어 빡빡하게 감아 붙입니다. 다행히 피는 보이지 않아요. 욱신대기는 하지만 지혈이 되어 마음이 진정됩니다.


하얀 반창고를 칭칭 감은 손가락을 보이며 상황을 설명하자 아내는 답답하다는 표정과 한숨으로

"아이고 바보야!" 합니다.


일주일 지나 손가락은 말끔하게 나았습니다. 그리고 또 열심히 설거지를 해요. 그리고 또 참치캔 하나가 눈에 거슬립니다. 그러나 두 번 당할 순 없지요. 손가락 대신 뜨거운 물을 부어 찌꺼기를 제거합니다. 노란 바닥이 뺀질뺀질 빛을 내자 다치지 않고 깨끗하게 닦았다는 뿌듯함을 느낍니다. 빛나는 동으로 된 작품을 전리품인 양 싱크대 옆에 올려놓습니다.


지나가던 아내가 분리수거를 위해 제 작품을 집어 들다가 손이 미끄러집니다. 아내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떨어지는 참치캔을 꽉 부여잡아요.


"아얏!"


외마디 신음과 함께 아내의 얼굴이 하얗게 변합니다. 설마 하며 손가락을 보니 빨간 피가 퐁퐁 올라와요.


"반창고!", "빨리! 반창고!!"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지릅니다. 물 묻은 손을 대충 털어내고 약통을 뒤져 아내의 엄지에 반창고를 감습니다. 피가 멈추니 마음도 진정됩니다.


"아이고, 이 바보야!"

"아니, 내가 뭐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까짓 참치캔 바닥에 떨어지면 어때서 그걸 기를 쓰고 잡냐? 아, 답답하네 정말!"


저의 뿔난 언어에도 아내는 싱긋 웃기만 합니다. 웃는 모습에 마음이 녹아요. 정말 우리 부부는 이심전심, 부창부수인가 봐요.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천정배필이라도 이제 그만 아프면 좋겠습니다. 피는 몸안에서만 돌기를 바라요. 불가능한 바람이죠.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모두가 서로를 찌르고 아프게 하니까요. 심지어 자란 가시가 제 몸을 파고들기도 하는, 그렇게 사는 게 인생입니다. 참치캔 날에 손이 벤 날처럼 허무한 피를 보기도 하고요.


그러나 다행히 제게는 아픔을 나눌 동지가 있습니다. 밤새 상처를 핥는 어미개처럼 나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사람 말이에요. 혼자가 아님에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온갖 아픔을 이해해 감싸안는 존재가 소중합니다. 피가 난 손끝은 쓰리지만 서로의 언어와 표정 뒤에 숨은 사랑이 심장을 따뜻하게 데웁니다. '야이 바보야' 하며 상대의 아픔을 가져가는 바보 같은 사랑. 그 사랑의 언어가 품은 따스함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반창고입니다.


나보다 나를 아끼는 한 사람의 언어가 상처를 이깁니다.

사랑 담긴 아픔의 언어가 아픔을 녹입니다.

상처 많은 열매가 진한 향기를 머금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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