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가을 탄다.
아내 허락 없이 구독한 얼음정수기 때문에 삼일동안 혼났습니다. 생각 없이 고른 게 아니라 수 십 개 고려해 그나마 제일 나은 걸 고른 건데요. 아내는 제 속도 모르고 차가운 얼음이 가족의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로 복날 닭 패듯이 몰아붙였어요. 저는 며칠 동안 빌고 빌어야 했지요. 정수기 설치한 날, 얼음 몇 알 띄운 물을 마시는 데 눈물이 찔끔거렸습니다. 이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싶어서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내는 갱년기입니다. 정확히 말해 그렇게 주장합니다. 벌써 2년째 우리 가족은 아내의 갱년기에 기가 눌려 딸들은 사춘기 흉내도 못 내고 아빠는 어깨를 좁히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스포츠 채널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돌릴 것을 명령합니다. 저는 꼭 보고 싶은 장면이라 조금만 더 보면 안 되냐고 물었지요. 아내는 제 간절한 부탁이 귀에 닿기도 전에 채널을 돌려 버립니다. 아내의 방송을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이들이 아이돌 노래를 듣겠다고 합니다. 저는 아내에게 밀린 것도 억울한데 애들에게까지 질 수 없다는 굳은 결기로 방송을 사수합니다. 아이들이 계속 떼를 쓰자 이번에도 아내가 애들이 원하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채널을 막아선 제 등을 사정없이 때리면서 "애들 노래 좀 듣겠다는 데 왜 그래? 왜 이렇게 자기 생각만 해!" 합니다. 돌아간 채널에서 나오는 듣기 싫은 노래를 들으며 따끈 거리는 등을 주무르며 내 신세가 왜 이렇게 서글픈지 모르겠습니다.
기분이 풀리지 않아 럭키와 산책을 택합니다. 산책줄을 들고 "앉아!" 하니 럭키가 흥분해 엉덩이를 바닥에 데지 않네요. 화가 납니다. 이제 개까지 나를 무시하나 싶어 산책줄을 다시 걸어놓고 혼자 마을길을 마구 걷습니다. 이웃을 만나 공손히 인사를 건넵니다. 그런 나 자신이 가식적으로 느껴져요. 인생 그냥 막살아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고 잘해 줘 봤자 다 소용없다는 자괴감도 몰려듭니다. 젊은 아들에게 도전당하는 우두머리 수컷의 심정이 이럴까 싶고, 다 내려놓고 산속에 들어가 자연인이 될까 하는 헛된 상상도 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갱년기는 아내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도 원치 않는 손님을 만난 거예요. 갱년기가 오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몸의 쇠락이라 주장하는 글을 봤습니다. 내려갈 길 밖에 없는 육체가 우울을 끌어온다고요. 꼭 맞는 말 같습니다. 음식도 가려 먹어야 하고 그나마 많이 먹으면 속은 어김없이 불편하고 불쾌해요.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해야 하고, 작은 글자 보기를 더러 포기합니다. 종족 번식의 본능과 함께 줄어드는 머리털은 야속하게만 느껴져요.
"얼음 정수기 선택한 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애들에게 아빠로서의 최소한의 권위는 세워 줬으면 좋겠어."
"뭔가 나쁜 일을 하고 혼나는 건 괜찮은데 죄 없이 자꾸 몰아붙이지 마."
아침에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아내에게 '나도 갱년기다!'라는 말대신 유치한 요구사항을 마구 던져요. 아내는
"알았어.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해." 합니다.
아기가 된 저의 모습과 쿨하게 돌아서는 아내를 보며 나 자신이 더 초라합니다.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이리 유치한 거야"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입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요.
'갱년기는 인생의 한 단계로 적절한 관리와 이해를 통해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AI가 내린 갱년기의 결론입니다. 살다 보니 AI에게 위로를 다 받네요. 특별히 '인생의 한 단계'라는 말이 와닿아요. '인생의 한 단계...' 어차피 넘어갈 시간이라는, 그래서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지요. 이 시기가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평안이 온다는 뜻이겠지요. 갱년기의 "갱"은 '다시, 새로워지다, 바뀌다'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맞아요. 우리는 바뀌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새롭게 말이지요. 이 시기를 잘 보낸다면 신체의 흐름은 조금 느려지더라도 영혼의 색은 더욱 짙어지지 않을까요. 그때까지 아내와 함께 조금 싸우고, 유치하고, 그래서 가끔 눈물을 찔끔거린다 해도 적절한 관리와 이해를 통해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 애쓰겠습니다. 시큰거리는 이를 꽉 깨물 수는 없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각오를 다져 봐야죠.
가을입니다. 제법 공기가 찹찹하네요.
저란 남자 원래 가을을 잘 타는데 올해는 정말 단단히 각오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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