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언어
결혼 5년 만에 찾아온 기적
첫 아이를 품게 되었어요.
초보 예비 아빠는
뭘 어찌해야 하는지 몰랐지요.
그저 고맙다는 말과 몸조심하라는 말만
되풀이했어요.
아내가 입덧을 해요.
티브이에서 보던 모습을 보며
주인공처럼 아내의 등을 두드리며
고통이 속히 지나길 바랍니다.
밥 두 공기 뚝딱 비우던 아내가
뭘 먹지를 못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에요.
"오빠…. 멜론…, 멜론이 먹고 싶어."
"응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영화 속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처럼
숨을 들이쉰 후 한참이나 걸려 힘겹게
멜론, 멜론을 불러요.
성급한 마음에 차에 시동을 걸어요.
2월의 저녁 10시.
가까운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낮이라 해도 작은 시골 마트에
멜론이 있을 리 없지요.
집에서 쇼핑몰까지는 25분 거리입니다.
미친놈처럼 차를 몰아 홈 000에 도착했어요.
빚쟁이처럼 아니 사냥꾼처럼
과일코너를 헤집으며 멜론을 찾아요.
없어요. 아무리 찾아도 멜론은 없습니다.
이 00으로 차를 몰아요.
흐르는 시간이 심장을 조여와요.
이 00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지요.
다시 차를 몰아 평소 과일을 자주 샀던
가게로 달려요
없습니다. 그곳에도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동남아까지 날아가고 싶어요.
12시가 다 되어 갑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셔요.
도심의 마트들도 이제 문을 닫아요.
포기할 수 없지요.
예전에 처제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마트로 달려갑니다.
간판 불이 꺼졌으나
내부에는 마감을 하는 직원들이 보여요.
일단 문을 열고 직원들의 의아한 눈총과
영업 끝났다는 손짓을 무시한 채
과일 코너로 직진합니다.
멜론!!! 멜론이 있어요!!!
딱 한 개 남은 멜론이, 작고 조금 쭈글 하지만
분명 멜론이 확실합니다.
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두 주먹 불끈 쥐고
"예스!", "예스!" 하며 멜론을 거머쥡니다.
만 사천 원.
그때, 담배 한 값 2천 원 정도였으니
비싼 녀석 겨울 멜론.
그래도 있는 게 어딥니까?
뿌듯한 마음에 몸값 귀한 멜론을 고이 앉혀
애지중지 모셔와 아내의 턱 밑에 내밀어요.
아내는 저와 눈 한 번 맞추지 않고
멜론을 좀비처럼 바라봅니다.
발이 없는 듯 거실로 가더니
커다란 식칼을 들고 와 멜론을 가른 후
한 조각 입에 넣어요.
"사각사각", "찹찹 촙촙", "스릅 스릅"
"아, 살 것 같다!"
심 학규가 눈을 번쩍 떴을 때
꼭 저런 표정으로 말했을 것 같아요.
저 또한 살 것 같습니다.
그날 새벽.
이상한 소리가 나요.
"사각사각…, 쭈압쭈압…, 스르릅 스르릅…"
눈을 떠 보니
이불을 뒤집어쓴 아내가 한 손엔 식칼을 든 채
먹다 남은 멜론 반 통을 얼굴을 파묻고
흡입 중입니다.
며칠 굶은 구미호가 소 간을 빼먹는 것 같아요.
"맛있어?"
"응."
저는 다시 눈을 감습니다.
이후로 멜론과 수박을 정신없이 사 날랐어요.
조그만 배에 커다란 수박 반 통이 들어갑니다.
남은 반 통을 냉장고에 집어넣으며
"아껴 먹어야지." 해요.
과일 먹고 낳은 딸은 올해 열다섯이 되었어요.
지인들과 아기를 가졌을 때의 대화가 시작되면
아내는 늘 자랑하듯 말해요.
"저는 임신했을 때 남편한테
서운한 게 하나도 없어요."
"한 겨울에도 남편 덕에 멜론 실컷 먹었거든요!"
"더 어려운 주문을 했어도 남편은
들어줬을 거예요."
하면서 자랑스러워하지요.
그러면 또래 여자분들은 아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제게 존경의 미소를 보낸 후
자신들의 남편을 째려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그때 멜론, 수박 사다 나르는 일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어요.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과 걱정뿐이었습니다.
박봉에 비싼 멜론, 수박값
눈곱만큼도 아깝지 않았어요.
그저 잘 먹어 주니 고맙고
웃어주니 행복했습니다.
사실 고생은 아내가 했으니까요.
저는 입덧이나 빈혈을 몰랐고,
밥 한 끼 굶은 적도 없습니다.
뱃가죽이 늘어난 자국도 없어요.
아이로 인해 인생 최대의 몸무게를 가진 적도 없고
한밤 중 다리에 쥐가 나는 고통도 겪지 않았지요.
해산의 두려움과 고통까지도 오롯이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저의 노력은 아내의 헌신에
보답하고픈 작은 열심일 뿐이었어요.
우리는 그때 서로를 섬겼어요.
아내는 처음 느끼는 모든 고통과 두렴움에도
불평불만 없이 남편과 아기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저는 아내의 사랑에 반응했지요.
섬김은 섬김을 받을 자나 섬길자가
서로 사랑할 때 온전해져요
받은 사랑을 깨달은 서로의
조건 없는 감사와 헌신이
바르고 아름다운 섬김인 것이지요.
새벽에 멜론을 먹던 아내는
제게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한 번
"같이 먹을래?" 하지 않았어요.
사실 그 부분은 내내 좀 섭섭해요.
그때 저도 멜론 먹고 싶었거든요.
침이 가득 고일만큼
소리도 향기도 참 맛났으니까요.
우리의 섬김이 달콤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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