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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Feb 26. 2024

삶의 안전장치

 쇼펜하우어를 읽다가

  첫 아이를 낳고 나니 내 세상은 아이 중심으로 돌아갔다. 세 뼘도 안 되는 조그마한 아이는 금방 젖을 먹어서인지 눈은 감은 채 입을 옴지락거리며 품 안에서 잠들어 있다. 가만히 코를 맞대고 숨소리와 체온을 느껴본다.


  '생명'이라는 단어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아이를 안고 있는 건 뱃속에 품은 아홉 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내가 비로소 엄마가 되었구나를 체감하는 순간.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 어느 것 하나 해결할 수 없는 아기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으면 아이는 어떻게 클까. 산후 우울증 같은 건 아니었지만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러다 미치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나의 부재로 인해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다. 나는 그만큼 나약한 사람이었고, 아이의 존재는 내 세상을 지켜주는 보호막이자 일종의 안전장치였던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막연하게 ‘잘할 수 있다’는 마음만 앞서, 아이를 낳고 ‘엄마’라는 자격을 얻은 거라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깨지고 박살이 나면서 진짜 ‘엄마’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는다. 


  고백하자면, 사실은 여전히 엄마라는 명찰만 달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할 때가 많다.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중에서 죽음과 삶에 관한 챕터를 읽으며 자꾸만 그때가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 다른 관점이자, 아님 전혀 엉뚱한 방향의 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이니 삶이니 하는 문제는 순간순간 다양한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정확히 '그 무엇이다'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힘듦 속에서도 웃는 순간은 존재했고, 마냥 행복함 속에서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금이 간 유리처럼 불안한 순간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자만했던 것은 오만이었고, 예상했던 순간들은 하나같이 빗나갔다.

절망이 온 것인지, 희망이 떠나간 것인지 헷갈리던 순간들.

그 과정 속에서 진짜 밑낯을  드러내는 나라는 사람.


  책이 좋다 안 좋다 할 평이 없다.  그저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면 될 뿐이다.

다만, 철학은 역시 어렵고 심오하다.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은 답이 없는 것 같기도.

책을 읽기 시작할 무렵 아는 언니와 나눈 이야기다.


"낙관주의는 뭔가 심오하지 않단 말이야. 덜 들여다본 거 같은? 더 깊은 건 외면하는 것 같고. 세상은 알수록 낙관적일 수가 있을까 싶은데 말이야. 내 세상이 그런 걸까?"

"그니까, 근데 또 낙관주의란 게 그 나름의 효용은 있단 말이지. 맞아! 또 속속들이 알면 진지하고 심오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진지하고 심오해지다 보면 결국 또 허무주의와 맞닿게 되는데.."

"중용이 답이라지만 난 약간 염세주의 쪽에 가까운 사람인 듯."

"무슨 주의, 이게 다 무슨 소용.ㅋㅋㅋㅋ"

"맞다! 에나꽁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낙천'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염세주의자'로 살면서  때때로 이 심오한 것들을 또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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