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와 비혼 아줌마의 중년.
1화. 다른 듯 닮아있다.
멕시코에서 사는 친구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기 위해 한국에 왔다. 친구는 아이 둘에 남편이 있는 아줌마다. 나는 남편이 없는 비혼 50대 아줌마다. 삶의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는 중년이 되었고, 닮아가고 있다.
철없던 20대에 지하철에서 70세 정도 된 할머니들이 ‘야, 계집애야’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낄낄댔었다. ‘야, 할머니들이 계집애야 하니, 정말 웃기다.’, ‘우리도 저 나이에 저럴까?’ 했는데, 그러고 있다. 나이도 먹고,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에도 아줌마 친구를 아무 생각 없이 '멍멍아'하며 부른다.
‘야, 멍멍아’를 50대에도?, 60대도! 70대도? 하지만, 아줌마 친구를 만나면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둘이 만나면 뭐가 그리 웃기는지, 웃음 없는 중년인데도 자주 낄낄댄다. 아줌마 친구를 만나면 공공장소도 잊는다. 그저 반가워 ‘야~!! 멍멍아’하며, 얼싸안는다.
아줌마 친구는 30대에 결혼해서 멕시코로 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타국살이의 힘듦으로 한동안은 전화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넉넉지 않았던 힘든 삶을 견디고 돌아온 아줌마 친구와는 경험도 못해 본 전우애를 느낀다. 절친인데도 자주 왕래하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함, 그리움 때문인지, 그런다.
'등이 굽었나?, 살도 많이 쪘네' 하는 동안, 마음의 찐함은 찐해진다. '나도 많이 늙었지?' 한다. 점점 구부정해져 가는 중년 아줌마의 모습이 아직은 덜 익숙한지, ‘야, 그래도 아직 괜찮다.’ ‘머리숱은 많네’ 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도 가져본다.
때로 나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은 마음에 안정을 준다. 보편성의 원리 때문인데, 그냥 하는 말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로 이해할 수 있다. 같이 늙는다는 것은 '우리'라는 동질성의 경험도 주므로 부분적인 다름을 때로는, 쉽게 포용하게도 한다.
이 안에서 몇 해 동안 잘 운영해 오던 서점 문을 닫았다는 또 다른 아줌마 친구 소식이 내 일처럼 다가온다.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경제 시장, 고금리 상태, 당근 마켓의 활성화가 자영업에서 능력을 발휘하던 아줌마 친구의 진로를 변경하게 한 모양이다. 새 책을 구매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든단다.
평생, 일해 온 일터에서 이제는 눈치가 보여 다니기 어렵다는 중년 비혼 간부인 아줌마 친구 얘기도 터져 나왔다. 멕시코 아줌마 친구사정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잠시, 시장 환율이 올라 모자를 생산해서 파는 남편 일이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아이 둘 키우며 사는 타향살이의 힘듦이 눈가의 피곤에서 전해진다.
나 또한 그렇다. 30대 후반에 상담공부를 시작해 박사가 되었지만, 상담사의 배출이 많아지다 보니, 시장에서 받는 보상은 점점 열악해진다. 노년을 어떻게 준비하나? 의 고민은 나뿐이 아니기에 터 놓는다. 돌아온 아줌마 친구가 반가워 우리는 함께 웃지만, 중년 아줌마 삶의 고단함은 웃음을 잊게 한다. 아줌마와 비혼 아줌마의 중년, 다른 듯한데, 참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