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해도 괜찮다.

by 빛나는 지금

너무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써놓고 정작 부끄러워지는 것을 보니 정말 나는 너무 열심히 살아온 게 맞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 안에 불안과 두려움을 엄청난 노력으로 막을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렇게 열심히 했다.


20여 년간의 교단생활.


나의 수업은 오로지 나 혼자 하는 수업이었다.


50여 분간 쉴 새 없이 말하고 또 말하고 쓰고 또 썼다.


수업을 빈틈없이 채우기 위해 ebs 수업을 보고 거기에 나오는 강사들의 어투와 표현까지 흉내 내가며 그렇게 혼자서 수업을 했다. 어떤 수업이 나와 학생들에게 맞는 수업인지 고민도 못했다.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찬 신출내기 교사였다. 나에게 어떤 수업이 맞는지, 함께하는 아이들과 어떻게 맞춰가야 하는지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했다. 나를 알고 타인을 알아가 가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시스템을 카피하는 것이 훨씬 쉽고 안전해 보였다.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쓰고 혼자서 문제를 풀다가 마치는 종이 울리면 교실 어디선가 지칠 대로 지쳐버린 어느 학생의 안도하는 혹은 질려버린 듯한 짧은 한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무얼 위해 나는 그렇게 열심히 혼자서 달렸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교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무시당할까 두려웠고

수업 중에 빈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교실 분위기가 엉망이 될까 두려웠다.


그렇게 혼자 말하고 설명하고 시험 문제 풀이를 하며 수업을 해내지 않으면 이 시간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지 몰랐고 영어 관련, 수업 관련, 시험문제 등, 이미 교과서적인 답이 적혀있어서 외워서 그대로 말해주면 되는 질문이 아니면 학생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몰랐다.


다다다 하고 떠들고 있는 동안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예상밖의 상황은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항상 미리 짜인 각본대로 수업은 진행되어야 했다.

그 각본을 벗어나면 나는 불안했고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 무능함에 타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도태될까 봐 두려워했다.


두려워서 너무 열심히 했다.


두려움의 근원을 지긋이 직면하기보다는 차라리 무언가라도 열심히 하는 게 쉬웠다.

열심히 무언가라도 하고 있는 동안은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었다.


결국 그 결과가 좋지 않다 하더라도 '그래도 열심히 했으니까'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나는 겁쟁이였고

나의 열심의 많은 부분이 그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위장막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다. 혼자서.


어떤 빈틈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날을 세워 혼자서 꾸역꾸역 하다 보니

내 수업을 통해 성장하는 학생은 별로 없었다.


왜냐면 나는 성장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나 혼자 다했다.


그렇게 악을 쓰고 열심히 하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덜 열심히 했더라면, 타인의 기대는 그의 몫일뿐,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할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음을 일찍 깨닫고 '그러냐? 너는 그래라. 나는 이러련다.' 하면서 싫어하는 것은 좀 덜하며 살았다면

나는 지금의 나를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더 좋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적당히 살아도 괜찮다.

좀 대충, 반쯤 나사 풀린 채로 살아도 괜찮다.


그 생의 빈틈으로 내 것이 아닌, 그런데 내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들이 천천히 들어와

더 좋은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나도 살고 내 곁에 가까운 누군가도 덩달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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