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저축하는 여자 ② 흩어진 시간을 모으다

by 빛나는 지금

교무실 오후 3시. 복사기의 윙— 하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만든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앉아 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다.


업무창을 띄워놓고, 그 옆 탭에는 블로그 글이 열려 있다.

‘워킹맘 루틴’, ‘시간 관리 노하우’, ‘작은 부업으로 경제적 여유를 만든 워킹맘 이야기’.


이런 블로그들의 글은 양면의 칼 같아서 읽는 동안은 무언가 유익하고 미래를 준비하게 만드는 동기부여도 되는 것 같은데 결국 지나고 보면 정작 해야 할 업무를 미루게 만든다.

문득 시계를 본다. 4시 10분.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조급함은 미미한 짜증으로 이어지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를 더 날카롭게 만든다.

오늘 끝낼 수 있었던 일을 내일로 미루며 퇴근을 준비하다 보면 개운하지 못한 채로 학교를 나서게 된다.

내 몸은 퇴근을 하는데 내 생각과 미룬 업무든 진득하게 교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하다.

어디서 시간은 새어버린 걸까...


집에 도착하면 저녁은 늘 비슷하게 흘러간다. 루틴 아닌 듯 루틴이 되어 고정이 되어가는 일상의 흐름들.

그 흐름은 일정하기에 안정감을 주고 매사 선택해야 하는 수고로움도 덜어준다. 다만 이 루틴이 득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 전제조건이 있는데 나를 포함한 가족 전원에게 유익해야 한다. 또한 쓰레기를 비우고 달라붙은 밥풀을 떼어내듯 지극히 현실적이어야 한다.


즉 우리 모두의 적나라한 집 풍경과 필요들, 그리고 하루를 보낸 이후 찾아오는 피곤이 반드시 계산되어 그 루틴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필요와 불가피한 현실들을 다 넣기는 했는데 여기에 긍정적인 방향성과 적절한 절제로 나름 느슨하지만 경계는 분명한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이 루틴은 말라붙은 음식 자국처럼 잘 떨어지지 않고 우리 모두의 저녁을 덜 생산적이고 더 피곤하게 조금씩 깎아내릴 수도 있다.


내가 발견한 우리 가정의 저녁 루틴은 그런 음식 자국들이 군데군데 묻어있다.


밥을 짓고, 반찬을 데우고, 아이들 밥을 챙기고, 설거지를 한다.

아. 예의 그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가 찾아온다.

어느덧 손에 들리는 스마트폰. 그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우니 이미 루틴이 된 셈이다.


쿠팡.
‘리필 필터 할인 중’.
당근.
‘근처에서 책장 팝니다.’
유튜브.
‘퇴근 후 10분 홈트, 40대 워킹맘 루틴.’


시계를 보면 어느새 10시 30분이다.

눈은 피곤하고, 마음은 더 복잡하다.
사지 않을 유아 책장과 의자는 왜 그리 오래도록 보고 또 보고 남들 사용후기는 왜 그리 샅샅이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건 없다.


그날 밤, 폰 메모장을 열고 하루를 기록해 보기 시작했다. 어떤 의도나 변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진심 궁금해서였다. 돈보다 더 안 잡히고 새어나가는 것 같은 시간의 행방이 궁금했다.


7:10 기상
8:00 아이들 등교
8:40 근무 시작
수업 / 업무
15:00 집중력 급저하 하락 — 블로그 탐독
17:00 업무 미루고 퇴근
18:00 저녁 준비
21:00 폰 시간 — 쿠팡, 당근, 유튜브
23:00 취침


글은 추상화를 정물화로 만드는 작업이다.


글자로 적으니 이상하게 실감이 났다.
‘일’과 ‘피로’ /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넘나드는 때
그 줄다리기 같은 사이사이마다 아무것도 아닌 구간이 많았다.

그 구간들이
의외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사흘에 한 번씩 사 먹었던 라테가 주말에 즐겼던 가족 외식이 한 달 지나니 큰돈이 되어

명세서에 남아있듯 그 '아무것도 아닌 구간'들은 자기들끼리 뭉치더니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여기 분명히 있었다'라고.


나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참 자주 했지만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그 사소해 보이는 시간들의 실체를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흩어지는 시간을 몰랐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시간들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꿔야 했다.
같은 하루라도
흘러가게 둘지, 모아둘지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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