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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숙 Nov 22. 2023

연필의 춤

멀리서 아프리카 춤이 슬픈 호흡으로 다가오고

그들이 팔려간 노예선과 긴 파도, 그런 게 생각나서

불현듯 백지의 나를 끌어당겼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달의 그림은 시작되었어요

내 몸은 연필의 흑심을 세워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런 첨단의 달빛 스케치도 

나의 백지에 대한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빛과 어둠으로 세운 촉각이

매일 밤 깨질 듯 위태로운 달빛이 되어 창문을 두드렸어요  

   

달을 그릴 때마다

생각의 더듬이는 허공에서 머물고 

몇 분 후 지워질 것들은 얼룩으로만 남아요

그것은 일종의 달에게 버려진 구름 같아서

남아메리카 사탕수수 농장으로 슬픔처럼 몰려들던

최초의 궁리는 끝내 

바람에 흩어지는 빗줄기로 너덜너덜해져요   

  

확실한 건 달에게 이르는 유일한 통로가 

뾰족한 연필의 춤이었다는 거

그때 연필심은 왜 스스로 검은 춤이 되어 백지 위로

필사의 몸을 던졌을까요    

 

이따금 달이 구름사이로 몸을 감추는 건 본능일까요

아니면 연필의 춤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백지의 고집일까요


이미 여백이 위험한 백지인 나는 

매일 밤 연필을 생각하며 미끄러지듯 춤을 춥니다    

 

앞으로 더 다듬어야 할 여백이 있을까요    

 

오늘도 나는 연필을 들고 기우제를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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