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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웜스 Oct 23. 2024

눈물이 없는 사람

내 인생 '따뜻함' 보정하기 #1



+따뜻함(warmth) 보정하기

보정 프로그램에 따라 '따뜻함' 또는 '온도'로 표기되어 있다. '따뜻함'은 사진의 색온도를 보정하는 것으로 온도를 높이면 노랗고 따스한 느낌의 사진이, 온도를 낮추면 푸르고 차가운 느낌의 사진이 된다. 색온도를 올린 사진은 마치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다정한 온기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차갑게 바라보며 외면했던 내 인생의 조각들을 색온도만 조금 높여 따뜻하게, 반짝이게 보정해보려 한다. 무언가를 따스하고 뭉클하게 바라보는 것에는 힘이 있기에.


[눈물이 없는 warmth +1]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감동적인 선물을 받았을 때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눈물이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할수록 눈물은 더 메말라서 당황스럽다. 그럴 땐 일단 내가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구구절절 설명한다. 한 방울의 눈물은 때론 백 마디의 감사와 위로보다 진심의 농도가 짙어보이기에, 감정을 눈물로 쏟아내는 통로가 막힌 듯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차가워 보일 거다.


원망스러울 정도로 안 나오는 눈물이지만 사람마다 조금은 이상한 포인트에서 눈물샘이 터져 버리기도 한다. 각자 마음에서 가장 껍질이 얇고 여린 부분, 감성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 여린 부분은 '이 정도면 나도 울만 하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납득이 되는 상황일 때도 있지만, 때론 굉장히 뜬금없어 스스로가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구체적으로 나는 할머니가 맛없는 음식을 드셨을 때 뜬금없이 눈물이 펑펑났다.


7명의 손녀들 중 맏손녀인 나는 ‘7공주 대빵’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할머니께서는 어떻게 손주 7명이 다 여자냐고 가끔 아쉬운 소리를 하시기도 하지만 할머니의 애정 어린 사랑과 걱정은 늘 넘치도록 받으며 자랐다. 대학생이 되어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혼자 할머니 댁에 내려가 방학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서울에서 출발해 저 멀리 경상남도에 사시는 할머니 댁에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리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래전부터 나와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지 마시라 해도 혹시나 내가 일찍 도착해 기다릴까 봐 걱정되신단다.


노년의 사랑스러움


할머니 집 거실에서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할머니가 점심으로 스파게티를 해주신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이태리 음식은 잘 접해보지를 않으셔서 서투시다. 스파게티를 만들어주신다더니 창고에서 업소용 참치캔을 들고 나오셨다. 조금 통통하게 불은 스파게티 면에 참치캔과 토마토소스를 넣어 만든 할머니표 스파게티였다. 그 스파게티를 한입 먹어보니 솔직히 말하면 정말 맛이 없었다. 그리고 뜬금없게도 내 눈가는 촉촉해졌다. 


'스파게티가 눈물 날 정도로 맛이 없나'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니 눈물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푹 박고 열심히 먹었다. 내가 잘 먹으니까 할머니가 참치캔을 집에 가져가서 스파게티에 넣어 먹으라고 그러셨다. 우리 집에 참치캔이 많이 없는 줄 아시는 할머니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참 서툴지만 따뜻함이 넘치게 담긴 할머니 스파게티를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유한하기에, 내가 나이를 먹어 훌쩍 큰 만큼 할머니의 시간도 어느새 많이 흘러버렸다는걸. 갑작스레 느껴진 시간의 얄미운 속도는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할머니가 후식으로는 부엌에서 도넛을 꺼내 오셨다. 시장에서 도넛을 사서 자주 드신다며 맛있다고 하셨다. 흰색 가루가 묻어있는 가성비 좋은 도넛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입에 그 도넛은 엄청 퍽퍽했다. 이상하게 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노티드 도넛과 런던 베이글에서 부드럽고 맛있는 빵 맨날 사 먹는데, 난 할머니 없어도 맛있는 음식 잔뜩 먹고 사는데 나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같아 할머니께 미안했다. 당신의 밥은 대충 때우시지만 손녀가 오는 날엔 새벽부터 부엌에 서서 음식을 해주시는 할머니의 너무도 치우친 마음에 새삼스레 목이 더 막혔다. 먹고 있는 음식의 가치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이 음식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할머니 음식은 배 터질 때까지 먹는다.


가족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밥에 진심이다. 할머니가 사시는 동안 맛있는 음식만 드시는게 소원이다. 손녀들이 먹고 남긴 밥, 마지막에 밥솥에서 긁어 담은 밥 말고 따뜻해서 델 거 같은 뜨끈한 밥과 국을 드셨으면 좋겠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 말고 할머니가 진짜 좋아하시는 음식을 많이 드셨으면 좋겠고, 할머니가 잘 드시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너무 많이는 말고 적당히 행복하게 드시면 좋겠다.


소중한 사람을 아끼는 마음은 서로에 대한 연민과 눈물로 표출되곤 한다. 차가워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따뜻한 밥을 먹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그저 평안히 지냈으면 하는 것. 손녀가 맨날 편의점 컵라면을 먹고살면 할머니가 세상 안쓰러워하시며 온갖 반찬을 다 해놓으시는 것처럼, 손녀는 할머니가 퍽퍽한 도넛을 드시면 근처 유명 베이커리의 부드러운 빵을 검색해 잔뜩 담아 온다. 각자 인생이 벅차 눈물이 메말랐더라도 사람은 사람 간의 사소한 걱정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으로 먹고 산다.


서울에 돌아와서 엄마 앞에서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나 울었다. 엄마가 왜 우냐고 물었는데, 도넛 때문에 운다고 하면 이상해 보일까 봐 말을 아꼈다. 그냥 할머니 생각이 나서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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