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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경희 Sep 14. 2023

바다를 건너온 피아노 <6>

6. 바다를 건너온 피아노


   한참 생각에 잠겼던 할아버지가 남은 보리차를 마셨습니다. 유리잔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또르르 탁자에 흘러내렸습니다.

   교무실에 갔던 교장 선생님이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일 처리가 좀 길어지는 바람에······.”

   “덕분에 푹 쉬고 있었스무니다.”

   할아버지가 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습니다.

   “저, 여기 오기 전에 아미동 비석마을에 갔스무니다. 그 당시는 ‘다니마치(谷町)’라 불렀지요. 죽음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아, 네. 해방 후 지명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특히나 변천정(辨天町) 금평정(今平町) 일대는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었죠. 그런 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다 하여 지금은 ‘광복동’이라 부른답니다.”

   교장 선생님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다시 말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해방 후 얼마 안 되어 한국전쟁이 났습니다. 전국의 피난민이 이곳 부산에 다 몰려들다 보니 살 곳이 없었지요. 평지가 모자라 결국에는 다들 산 위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아미동 같은 경우는 일본인 공동묘지 비석 위에다 천막을 치고 살게 되었답니다. 집 지을 재료도 없어 자갈치시장에서 생선 상자나 널빤지를 구해다 판잣집도 짓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다 전쟁 탓이지요.” 

   할아버지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르신 아미동은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저, 사실 돌아가신 제 어머니도 그곳에 계시무니다.”

   교장 선생님이 바짝 다가앉아 다시 물었습니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쳤습니다. 

   “저, 죄송합니다만 어르신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노무라 카즈오라고 하무니다.”

   교장 선생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 이럴 수가······. 어르신, 혹시 신 ․ 용 ․ 수라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요. 내가 어찌 그 이름을 잊겠스무니까? 나의 유일한 조선인 친구였스무니다. 어떻게 그 사람을 아시무니까?” 

   손수건을 쥔 할아버지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마른 침을 삼켰습니다.

   “제 아버님이십니다.” 

   할아버지는 교장 선생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살아계시무니까?”

   “안타깝게도 지난해 돌아가셨습니다.”

   잡았던 할아버지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습니다. 

   “세상에, 내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아버님은 늘 어르신 소식을 궁금해 하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몇 년 전 이 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자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카즈오가 다니던 학교라면서. 이렇게 어르신을 뵙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할아버지 눈에 눈물이 글썽거립니다. 

   “정말 안타깝스무니다. 참 좋은 친구였지요. 그때는 전쟁 중이라 해도 우리 둘만 있으면 즐겁고 몸도 마음도 쑥쑥 자랐어요.”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빙그레 웃었습니다. 

   “용수는 우스갯소리도 잘하고 무슨 놀이든 척척 잘했어요.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스무니다.”

   “아버지도 종종 어르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음이 참 따뜻한 친구였다고요. 살아계셨다면 정말 좋아하실 텐데······.”

   할아버지는 용수한테 인사도 못 하고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아버지도 일본으로 떠나는 걸 못 봤다며 아쉬워하셨어요. 일본 주소만이라도 알면 연락해 볼 텐데 하셨지요.”

   “크면서 차츰 깨닫게 되었지요. 용수 이름이 왜 두 개였는지. 아무리 부모 세대라고는 하나 일본인들이 내가 태어나 자란 조선 사람들을 괴롭혔다니······. 마음이 복잡했어요. 미안하고요.”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뉴스에서 부산 소식이 나올 때마다 용수 생각이 났지요. 찾아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전쟁 후 많이 변해 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또 일본 사람들을 좋아할 리도 없고 해서 차마 용기를 못 냈스무니다.” 

   교장 선생님이 할아버지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저, 어르신. 저랑 꼭 가셔할 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아미동에 있는 자그마한 절로 갔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납골당에 있는 새하얀 항아리를 가리켜 말했습니다.

   “어르신, 이게 어르신 어머님 유골함입니다.”

   할아버지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아버지가 저를 아미동 비석마을로 데려가셨어요. 여름 방학이었는데 몇 날 며칠을 어르신 어머님 비석을 찾아 헤매었지요. 겨우 어느 집 벽에 파묻힌 비석을 찾게 되었어요. 다행히 ‘노무라 가의 묘’라는 글씨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어 알 수 있었지요.”

   “세상에······.”

   “그 집 아주머니 말씀이 6.25 전쟁통에 피난 왔다고 하더군요. 살 곳이 없어 묘지 위에 집을 짓게 되었는데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 난리 속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겠지요.”

   “여러 해 지나 그 집에서 온돌공사를 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가 달려가 집 아래 파묻혀 있던 유골 항아리를 찾아냈답니다.”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물을 닦았습니다. 손이 가볍게 떨렸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스무니다. 내 평생 불효만 하였는데······.”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내 죽어서 용수를 만나면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덕분에 이제야 어머니를 고향에 모실 수 있게 되었스무니다.”

   “아마 아버님도 하늘나라에서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교장 선생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며칠 후, 할아버지는 유골함을 모시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운동장의 은행나무가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샛노란 은행잎이 노랑나비 같습니다. 날개를 살랑거립니다.

   교장 선생님 앞으로 할아버지의 편지와 피아노가 전달되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저를 대신하여 어머님 유골을 모셔준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머지않아 천국에 가게 되면 용수를 만나 나의 진심을 전할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길 바라며

    죄송스러운 마음, 빚진 마음, 고마운 마음을 피아노에 담아 보냅니다.

    부산의 어린 후배들에게 나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용수가 있는 하늘나라까지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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