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녀가 된 큰딸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그동안 여러 군데 원서를 냈는데 한 회사에 취직이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아이 양육을 고려해서 하루 8시간 근무도 탄력제로 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엄마, 어떻게 할까요? 연봉도 기대 이상이고, 아이들 때문에요.”
딸의 전화는 내가 아이들을 봐 준다면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큰손자가 초등학교 1학년이고 둘째인 손녀가 4세로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갓난아기 키우는 것도 아니고, 또 하루 종일 데리고 돌봐야 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딸이 어려운 학위를 따고 전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그동안 아이 키우느라 하루 종일 집안일에 헉헉대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했다.
“무조건 한다고 해라. 그런 자리 다시 찾기도 쉽지 않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고, 나의 황혼육아가 시작됐다.
100세 가까이 산 철학자 한 분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는 60세에서 75세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자녀 양육의 의무에서도 또 자기의 일에서도 다 벗어나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진정한 자기 발전과 성취를 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때였다. 내가 바로 그 나이, 그렇게 좋은 때가 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나는 지금이 더 좋다며 가지 않을 것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며 버킷리스트도 작성해 보았다.
1970년대 초 여성들의 대학진학률이 3퍼센트밖에 되지 않을 때 내가 대학원까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면서 한편 멍에였다. 배운 만큼 사회에 빚을 졌으니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 아니 그보다 일한 만큼 그 대가인 봉급을 받고 시간이 지날수록 승진도 할 수 있는 것이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좋고 성취감도 컸다. 그러나 시부모나 친정부모가 아이들을 맡아줄 형편이 되지 않아 나는 아이 보는 사람에게 양육을 맡겼고 그건 참으로 문제가 많고 힘드는 일이었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헤매다가 결국 일을 그만두기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내 딸은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지.’ 딸에 대한 엄마의 진심이었다.
하고 싶은 일들을 잠시 접고 우선 딸네 집 이웃으로 이사를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딸과 사위 대신 아이들을 챙겨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고, 오후에는 두 아이를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돌봐주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할 만한 일이었다. 새벽부터 시간 맞춰 움직이다보니 저녁에는 피곤하여 일찍 자게 되고 내가 마치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된 것 같았다. 몇 달은 잘 지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자주 아팠다. 독감이 유행하거나 감기가 돌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옮아오는 것이다. 학교나 어린이집에 가지 못하는 아픈 아이를 하루 종일 돌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앓고 난 다음에는 나도 감기에 걸리기 시작하더니 몸에 이상이 온 것이다. 병원에서는 무리하지 말고 잘 쉬라고만 했다.
몸이 아파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고 꼼짝없이 집에만 있게 된 어느 날, 딸이 집에 와서 “엄마, 정말 죄송해요. 제가 엄마 노후의 시간도, 건강도 갉아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하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다른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아침에는 아이 돌보미를 부르고 오후에는 본인이 돌본다는 것이다. 퇴근하며 어린이집에 들러 둘째를 데리고 오고, 학교가 일찍 끝나는 큰아이의 오후 일정은 학교 방과후수업과 각종 학원에 보내는 것으로 채웠다.
“엄마는 오늘도 꼴등이야, 어제는 준성이가 일등이고 그제는 승호가 일등인데 엄마는 맨날 꼴등이야.” 손녀가 어린이집에 늦게 온 엄마에게 울먹이면서 소리친 말이라고 한다. 딸은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7시 출근 4시 퇴근 후 부랴부랴 아이를 데리러 가도 아이에게는 항상 꼴등엄마일 뿐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4시에 집에 가면 그 후에 머무는 아이들은 문소리만 나도 모두 뛰어나와 누가 왔는지 확인한다. 엄마가 온 아이들은 의기양양 기쁜 얼굴로 뛰어가고 다른 아이들은 실망한 얼굴로 “우리 엄마도 금방 올 거야.”라고 얘기하며 들어간다. 네 살 손녀는 그렇게 실망한 얼굴로 한 시간을 내내 기다렸던 것이다.
경단녀에서 다시 워킹 맘이 된 딸은 “좋은 아이돌봄센터 하나만 동네에 있어도 이렇게 힘들 지는 않을 텐데.”하고 한숨을 쉬며, 정부의 정책은 육아에 도움을 전혀 주지 않는다며 힘들어한다. 그나마 아이 친구 엄마들이 도움을 많이 준다. 갑자기 회의가 늦게 끝나거나 저녁 일정이 생길 때, 남편마저 빨리 퇴근할 수 없는 비상사태일 때는 친구들, 동생들, 그래도 안 되면 나에게 전화를 한다. 딸은 말한다. 대한민국에서 워킹 맘으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부탁 전화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아무래도 내가 다시 아이들을 돌봐주어야 할 것 같다. 오후시간 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