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번 생에서 나는 '호구'라는 별명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친구, 동료, 심지어 낯선 사람에게도 이용당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죠. 그게 이번 생이었다면, 다음 생에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브라질의 미움받는 아나콘다입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 나의 탄생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어미는 아마존의 지배자, 역대 최악의 악당이라고 불린 아나콘다로, 현상금 사냥꾼들의 일급 수배범이었기 때문이죠.어느 날, 브라질 정부는 아마존의 지배자인 나의 어미는 물론, 비슷하게 보이는 아나콘다의 어린 새끼들까지 무자비하게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아나콘다를 완전히 아마존 숲에서 사라지게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억하는 어미의 모습은, 당당한 아마존의 지배자가 아닙니다.
사냥꾼에게 쫓겨 불이 나게 도망가는 그녀의 초라한 몸부림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버리고 도망가는 어미를 보며 나는 사냥꾼에 대한 미움보다도 버림받았다는 사실에마음 아파했습니다.
도망가는 어미의 뒷모습을 마주한우리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숨었지만, 나를 제외한 새끼 아나콘다들은 사냥꾼들의 손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물론 나는 커다란 나무뿌리 아래로 우연히 굴러 떨어졌기에 사냥꾼들의 눈에 띄지 않고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빛이 들지 않는 끈적이는 진흙 속에 파묻혀 나는 생각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 어미를 잃은 것도 억울한데, 인간들은 나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처럼 여겼습니다.그들의 눈빛과 행동은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죠. 이 숲과 인간 모두에게 내 분노를 보여주겠다고.
만약 인간처럼 이 순간을 역사에 기록할 수 있다면, 저는 이렇게 기록하겠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아나콘다가 태어나다."라고요.
나의 복수는 정당하기에, 나는 더욱 사악해질 계획입니다.
물론 나도 태어나는 순간 복수심을 안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든 태어난 순간 어미에게 버림받고 또 처음 보는 생물(사냥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다면 자연스레 세상을 향해 복수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복수심은 정당하며 나는 충분히 사악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나의 복수는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사악해질 것입니다. 또 이를 위해 아주아주 커다란 아나콘다로 성장할 계획입니다. 비록 어미의 마지막 모습밖에 보지 못했지만 어미는 대략 2층 높이 정도로 길었습니다. 그 두께 또한 사냥꾼들의 몸통만 했으니 최소한 이보다는 크게 성장할 마음입니다. 그녀는 새끼들을 버리고 사냥꾼들을 피해 도망을 가야 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는 못했으니까요.
나는 그녀를 뛰어넘어 브라질 아니 전 세계의 역사 상,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나의 성장을 한 번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마음껏 나쁜 짓, 그리고 미운 짓을 골라할 겁니다.
나는 세상을 향한 정당한 복수심으로 무장되었기에, 복수를 실행하기 위한 첫 단추로 나의 길이와 두께를최대한으로크게 키울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동안 지켜져 온 아마존의 규칙을 어기고 또 파괴하며 온갖 작고 연약한 동물들을 나의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차피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순식간에 꿀꺽하고 삼켜낼 수 있기에 규칙 따윈 어겨도 아무도 모를 것이고, 설사 안다 해도 나에게 감히 반기를 들 수는 없습니다.
특히 작거나 힘이 없는 동물들은 내 사냥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아마존 강에서 새끼 나무늘보를 한 입에 삼키려다가 나만큼 사악한 눈 빛을 가진 녀석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녀석의 이름은 '악어'라고 하더군요. 그는 나만큼 크진 않지만 내가 어른이 되기까지는 그래도 조심해야 될 녀석인 것 같았습니다. 이빨이 꽤나 날카로워 보였거든요.
나의 라이벌, 그 악어라는 녀석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마존 동물들은 나와 눈만 마주쳐도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고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숲의 악동들인 원숭이들은 나와 마주치면 나뭇가지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제 새끼들을 숨기기 바쁘고, 어린 시절 나를 위협하던 맹금류들은나를 하늘에서 감시하다가도 내가 하늘을 향해 눈을 치켜뜨면 급히 높게 날아오릅니다.
'저 녀석이야, 그 새로운 악당 아나콘다!'
숲 동물들의 수군거림이 내게 들릴 때마다 나는 내 악명에 만족하며 기분 나쁜 미소를짓곤 합니다.
나는 결국 이 숲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 숲에서 유일하게 나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경쟁자 악어 녀석이 내 뱃속에 들어온 순간, 나는 어미의 악명을 뛰어넘어 역사상 최악의 악당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나의 앞 길을 막아서고자 했던 녀석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내 뱃속에서 후회하는 것뿐이었죠.
드디어 아마존 역사상 가장 최악의 사악한 아나콘다가 되었습니다. 나의 피부는 마치 강철 같으며 나의 존재는 아마존의 밤을 누비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나의 비릿하고 기분 나쁜 냄새는 뜨거운 바람을 타고 아마존 전역을 긴장과 두려움으로 몰고 갑니다.
그동안 지켜져 온 아마존의 규칙을 깨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모두 잡아먹은 나는 이미 어미를 훌쩍 뛰어넘어 3층 높이까지 성장했습니다. 인간 사냥꾼들은 나를 사냥하려고 하기는커녕 무서워서 벌벌 떨 뿐이죠. 왜냐하면 그들 몇몇은 나의 뱃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나는 미움받으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인 역대 최악의 악당이 되었습니다.
아나콘다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기에, 마음껏 나쁜 짓을 해봤고 또 마음껏 미움까지 받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두려움과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이 숲의 지배자가 되었죠. 하지만 오늘 밤, 차가운 달빛 아래 홀로 웅크린 나는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무언가를 삼킬 때마다 텅 빈 허기를 채웠지만, 그 허기는 점점 커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두려움을 먹고살았다면, 내게 남은 것은 끝없는 고독뿐인 듯, 오늘 밤이 더욱 외롭게만 느껴집니다.
나는 세상을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존재가 되었지만, 오늘처럼 조용한 밤에 홀로 웅크려 있을 때면 내 안에서 무언가 결핍된 울림이 느껴집니다. 이런 날에는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마저 외롭게 느껴집니다. 이 넓은 아마존에 친구가 없는 동물은 나 혼자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왠지 악당이란 이름을 벗고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곰곰이 지난 인간의 생을 돌이켜보니 나를 이용하고 상처 줬던 사람들이지만, 오늘은 왠지 그들 속에서 느꼈던 따뜻함과 작은 웃음이 그립습니다.
어두운 밤, 조용한 숲 속, 나는 느낄 수 있습니다.
저 멀리서 인간 사냥꾼들이 떼를 지어 나의 사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의 악당의 역사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탕, 탕, 탕"
나는거대하고 또 힘이 세지만, 인간 사냥꾼들이 준비해 온 번개와 같은 총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악당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죗값을 치를 때인가 봅니다. 나의 커다란 몸이 힘 없이 쓰러져 땅에 닿을 때, 나는 생각합니다. 아나콘다로 태어난 것은 아마도 잘 못된 선택이었는 것 같다고요.
나는 브라질의 미움받는 아나콘다로 살았습니다.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지만, 정작 내게 남은 것은 고독과 후회뿐이었습니다. 나는 가장 거대한 아나콘다였지만, 반대로 가장 큰 고독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