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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22. 2024

동생의 잠입

퍼진 세단이 길을 질러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제리였다. 그는 의미 없는 토론 뒤에, 청소를 위해 계단을 올랐고, 그를 발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브러시와 걸레, 광택제가 제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제리는 조용히 창을 닫았다. 그리고 시가의 불을 끄고서 손에 쥔 것들을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차고로 차가 다가오는 속도에 맞춰 제리는 계단에 발을 내렸다. 2층에 도착한 제리는 소파를 바라봤다. 여전히 토론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제리는 단 한 번의 고함으로 그들 모두를 멈췄다.


“숨으세요!”


그를 들은 모두가 어정쩡하게 있는 사이, 딘의 상황판단이 가장 빨랐다. 딘은 카리브에게 소년을 맡기며 방을 가리켰다. 반드시 문을 잠그고 있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카리브는 소년을 잡고 뛰었다. 그리고 딘은, 제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페퍼를 방 안으로 들여보내고, 자신도 황급히 몸을 숨겼다. 쟝은 차고 1층에 가득히 쌓여 있는 상자 뒤에 숨어 총알을 장전하고, 조준경으로 입구를 겨눴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도착했다. 벨이 우렁차게 울렸다. 제리는 쟝을 향해 대기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한 번 더 벨이 울렸다. 제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 있습니다.”


그에 밖의 남자가 말했다.


“아아, 다행이다.”


제리는 차고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절반이 채 열리지도 않은 곳으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제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의 손에 무기가 없는지 확인했다.

     

“수리도 하나요?”


흰색 모자를 쓴 남자가 물었다.


“음…. 보통은 하기도 합니다만, 거의 대형 차량을 다루는지라.”


제리의 다음 말은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였다. 하지만, 남자의 대꾸가 더 빨랐다.


“잘됐네요! 그럼, 저 정도 크기의 차는 순식간에 해치우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제리는 남자 너머의 차를 보고는 대답했다.


“더 가까운 정비소가 있었을 텐데.”


“아, 아뇨. 이 집이 제일 가깝습니다.”


“엔진도 나갔습니까?”


“그건 모르겠고, 타이어 하나가 나갔네요.”


남자는 슬쩍슬쩍 웃으며 말했다.


“일단 상태를 보죠.”


그리고 제리는 남자를 안으로 불러들이며 차고 문의 반을 마저 열었다. 쟝의 조준경이 남자를 따라 움직였다.


“차를 끌고 올까요?”


남자가 물었다.


“보통은 펑크 난 차를 견인하는 게 정석입니다만, 거리가 가까우니 그렇게 해 주셔도 됩니다.”


“네네. 그럼, 잠시만…”


남자가 나가자, 박스 뒤에 숨어 있던 쟝이 벌떡 일어나며 제리를 불렀다.


“저 개새끼 당장 죽여야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아직은 몰라요. 여차하면 제가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봤습니다. 저 음흉한 새끼가 제리 씨 차고를 여우 같은 눈으로 훑는 것을요.”


“그건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넓은 곳에 오면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요. 일단은 섣불리 행동하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말씀하신 대로 정말 개새끼가 맞으면, 그땐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차의 시동 소리가 들리자, 쟝은 다시 몸을 숨겼다. 털털거리는 소리가 났다. 흰색 유광에 군데군데 붉은 얼룩이 있는 세단이었다. 핏자국은 아니었다. 피와는 색이 달랐다.


“어디에 세우면 되죠?”


입구를 통과한 남자가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어차피 바퀴를 갈려면 잭도 올려야 하고, 벽돌도 놓아야 하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차 한 잔 가능할까요?”


제리는 대답했다.


“가져다드리죠.”


“메리골드로.”


차바퀴가 제리가 뱉어 놓은 담배꽁초를 지르밟으며 차고 깊숙한 곳에 멈춰 섰다.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옷차림은 간소했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에 흰색 슬랙스. 발목이 보였고, 아래에는 헐렁한 슬리퍼가 발을 감싸고 있었다.


“어느 바퀴입니까?”


제리는 물었다.


“저기 저, 왼쪽 앞바퀴입니다. 사실 왼쪽 뒷바퀴도 간당간당하긴 한데, 저것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제리는 뒷바퀴를 슬쩍 봤다.


“어떻게, 오신 김에 저것도 고치시겠습니까?”


“아뇨. 됐습니다. 그냥 앞바퀴만 손봐 주세요.”


그리고 남자가 이어 말했다.


“메리골드는?”


“죄송하지만, 그런 비싼 찻잎은 없습니다.”


“그래요? 아쉽네…”


“다른 거라도 드릴까요?”


남자는 껄렁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물었다.

     

“이 넓은 곳을 혼자 관리하시나요?”


그에 제리는 말을 돌렸다.


“근처에 사신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 네. 근데 여기는 처음 와 보는 거라서요. 제 질문이 이상했나요?”


“전혀요.”


“그래서, 혼자 관리하신다는 거죠?”


쟝은 남자의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그리고 숨을 참으며 제리의 수신호를 기다렸다.


“뭐, 일단은 그렇습니다. 근데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남자는 기침을 콜록대는가 싶더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우렁차고,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차고 구석구석을 찔렀다. 그가 웃음을 그친 건, 제리가 풀어진 장사치의 얼굴에서 무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볼 때였다. 제리의 표정을 본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상자 쪽으로 몸을 돌리며 또 한 번 같은 동작을 보였다.


“거기 숨어 계신 분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개새끼가!!!”


쟝이 방아쇠를 당길 기세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제리는 말리지 않았다.


“아, 잠시만요. 저는 죽으러 온 게 아니에요.”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공중을 향해 소리쳤다.


“혹시 왼쪽 타이어가 구멍 나지 않으셨습니까!!!!!”


쟝은 한 걸음, 한 걸음,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위층에서 문이 열렸다. 딘이었다. 딘은 이제 막 불을 붙인 담배를 그에게로 떨어뜨리며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왔다. 남자는 해맑음을 띤 미소로 딘을 맞았다.


“이거, 이거, 뵙고 싶었습니다.”


딘은 내려옴과 동시에 남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난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날 아나 보군요.”


남자는 침을 닦으며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물론 알지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 찾아왔지.”


제리는 남자의 시선이 딘에게 쏠린 사이, 다른 사람이 나오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뭘 망설여? 그냥 죽이면 되는 일을.”


쟝이 총을 겨누며 말했다.


“소용없어.”


딘이 말했다. 그리고 딘은 여전히 쪼개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일전의 앞치마인가?”


“앞치마?”


“아닙니다. 녀석은 이놈처럼 키가 크지 않았어요.”


제리가 말했다.


“무슨 얘기가 오가는 것인지?”


남자가 물었다.


“아니면 됐습니다.”


그리고 딘은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신들의 계획을 들으러 왔습니다. 물론 알고 계시겠죠.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여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되든, 넌 오늘 살아서 못 나가.”


쟝이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근데 저는 죽어도 딱히 상관이 없어요. 동생이 있거든요. 제 동생을 찾지 못하는 이상, 당신들이 이 재밌는 인질극을 막을 순 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녀들을 살리고 싶으면 계획을 말하세요. 뭘 하려는 건지, 또, 언제 그걸 할 예정인지.”


“뭐야, 결국 넌 아는 게 하나도 없네?”


딘이 재잘대는 남자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분노가 깔려 있었다.


“그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했구나? 그렇지? 그래서 제 발로 여길 찾아온 거고.”

     

딘은 남자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그리고 아래로 주저앉은 남자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며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미안하지만 우린 어제 결론을 내렸어. 그 사람들을 버리기로.”


남자는 예상치 못했다는 눈으로 딘을 올려다보았다. 혼돈은 순식간에 남자를 잡아먹었다. 비유하자면, 전지가 다 되어 가는 장난감을 보는 것 같달까. 남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바닥에 몸을 이리 처박고, 저리 처박았다. 동생이 그에게 말한 대로 그에 대한 답이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이 사람들을 버리면?’


그리고 남자는 한동안 바닥에 웅크려 일어나지 않았다. 제리와 딘, 그리고 쟝까지. 세 사람 모두 남자를 향한 경계가 풀린 지 오래였다. 다들 끝난 싸움이라 생각했다. 쟝은 이미 총의 레버를 올려 있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만 일어나시죠.”


제리의 말에도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리고 쟝이 비실거리는 남자의 몸을 발로 걷어차자, 그의 손에 들린 통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쟝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고, 동시에 총구를 그의 손에 겨누어 발사했다. 2층에선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1층에 있던  모두에게로 새빨간 피가 튀었다. 남자는 온갖 욕을 곁들여 팔을 껴안고 뒹굴었다. 그가 뒹굴 때마다 손이 날아간 자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마치 거꾸로 매달아 놓은 분수대 같았다. 쟝은 장소를 바꿔 그의 머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리가 딘의 곁으로 왔다. 딘의 손에는 키패드가 날아간 통신기가 들려 있었다. 작은 창 위로 단어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내일.


메시지가 떠 있는 곳은 발신함이었다. 그렇다는 건, 동생이 메시지를 무사히 받았다는 의미가 된다. 딘은 제리를 보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제리는 딘에게 통신기를 달라고 말했다. 제리는 주머니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통신기의 뒤판을 풀었다. 초록색 표시등이 멀쩡히 반짝이고 있었다. 딘은 머리를 짚었고, 제리는 단말기를 남자가 있는 바닥으로 힘껏 내던지며 괴성을 내질렀다. 소강상태가 찾아온 건,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대략 15분이 경과했을 때. 남자는 더 이상 욕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반쯤 미쳐 있었다. 2층에 숨어 있던 모두가 아래로 내려왔다. 소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단났네.”


카리브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딘이 말했다.


“나 같은 사람한테 죄송할 게 뭐 있어요. 사과를 하려면 애한테 해요. 애가 볼 풍경은 아니잖아요, 이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카리브는 소년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앞으로 나왔다.


“그래서, 이 사람인가요? 퓨티 씨와 워블 씨를 데려간 게.”


쟝이 총을 내리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개새끼가 총 두 마린데, 이 새끼가 형이랍니다.”


“동생은요?”


“시발. 그게 문제인데…”


딘이 팔을 뻗어 쟝의 입을 막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그 두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겁니다.”


“행방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요?”


“방법이 없습니다. 저 통신기는 가더 전용이거든요. 우리로선 해킹도, 탐지도 불가능하죠.”


카리브가 물었다.


“그런 걸 얘네들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죠?”


딘은 이마를 긁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길에서 주웠거나, 친하게 지내던 가더가 있었거나, 둘 중 하나겠죠.”


그리고 구석에서 손을 씻던 제리가 말을 보탰다.


“뭐가 됐든 우리는 계획대로만 하면 됩니다.”


카리브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요, 저더러 500명을 막으라고요. 알겠어요, 알겠어.”


“꼭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나와 봤자 동생 혼자일 거예요. 혼자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지요. 동생이 똑똑한 사람이라면 애를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총알 한 발로 상황을 끝낼 수 있습니다. 구출이 오히려 쉬워진 거죠.”


그에 소년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럼, 누나 둘을 다시 볼 수 있는 건가요?”


딘이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쟝이 딘에게 물었다.


“이봐, 딘. 저 개새끼는 어떻게 하지? 아직도 살아 있어. 대단한 새끼야.”


딘은 다문 입속으로 혀를 한 바퀴 돌린 다음, 쟝에게 있는 총을 가로채어 남자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를 본 카리브는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양손으로 소년의 두 눈을 가려 주었다.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의 모자는 더 이상 흰색이 아니었다. 남자는 총구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흘렸다.


“……너희들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그걸 알려 주려고 왔어. 그리고 또 한 가지, …메리골드는 내가 아는 유일한 찻잎이야.”


가만히 놔두어도 죽을 사람이었다. 딘은 그걸 바라지 않았을 뿐.


“한 손은 곧 만날 동생에게서 받아. 받을 수 있다면 말이지.”


그렇게 딘은 남자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카리브는 소년을 데리고 올라가 버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청소에 매진했다. 특히 차고가 제리의 것이었기 때문에, 청소가 매우 중요했다. 줄곧 말이 없던 페퍼도 걸레질에는 동참했다. 제리는 하나하나 세심하게 청소가 필요한 장소를 가리켰다. 남자의 시체는 그가 타고 온 세단과 함께 폐차장으로 옮겨졌다. 쟝이 기름을 둘렀고, 딘이 라이터를 던졌다. 비록 번지가 1번지지만, 차고에서 검은 연기가 오른다고 한들,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밀대를 든 쟝은 바닥을 밀며 끊임없이 투덜댔다. 그의 긴 혼잣말을 요약하자면, 어차피 장벽을 올라 E구역으로 넘어갈 것인데, 무엇 하러 F구역에 남을 걸 신경 쓰느냐는 것이었다. 쟝의 옆을 지나가는 사람은 한 번쯤 그를 들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쟝의 말을 들은 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청소가 끝난 시간은 오후 4시가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늦은 오후의 이른 저녁밥 냄새가 은은히 가라앉은 피비린내와 뒤섞여 차고 1층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2층은 기념일 분위기가 물씬 느 껴졌다. 존재하지 않던 식탁 위에는 예쁜 그릇들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윤이 흐르는 접시 위에는 육즙으로 가득 찬 두툼한 스테이크가 높게 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와인잔을 닮은 자그마한 술잔이 있었는데, 그에 불을 지피려는 제리의 행동에 말들이 오갔다.


“이러다 아주 기도문까지 외겠구먼.”


쟝이 포크와 나이프를 소리 나게 비비며 말했다.


“왜, 또. 뭐가 문젠데요.”


카리브가 말했다.


“잘 봐요. 이게 포크고, 이게 나이프예요. 저건 스테이크고.”


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건 단순한 촛불이 아니에요! 은총의 빛이라고요!”


소년이 포크를 번쩍 치켜들며 말했다. 거기서 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 은총의 뭐? 야.”


카리브는 웃으며 소년의 기세에 동참했다.


“어우- 낭만적이야. 소년아, 너는 그렇게만 자라렴. 저런 아저씨가 되지 말고.”


“나이?! 이봐, 아가씨. 몇 살이야?”


쟝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카리브는 소년을 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아무것도 배우지 마.”


그 사이 제리는 술이 담긴 여섯 개의 유리잔에 불을 피워 놓았다. 그를 본 페퍼는 가만히 있던 상체를 앞으로 숙여, 불을 손안에 머금었다. 페퍼의 행동에는 묘한 흡입력이 있었다. 재잘대던 쟝을 다물게 했고, 무겁게 떠 있는 주변의 공기를 사뿐히 디딜 수 있을 것처럼 가볍게 만들었다. 따뜻하고, 푸근했다.


“음악은 어떤 걸로 할까요?”


제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재즈!”


카리브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쟝이 반박했다.


“음악이요? 오늘 뭐, 뒤진 새끼 추모라도 하자는 겁니까?”


“아, 진짜.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딘, 내가 틀려?”

     

딘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쟝에게 말했다.


“야, 이 등신아. 어느 미친놈이 추모곡으로 재즈를 틀어?”


“뭔데, 그럼?”


쟝이 물었다. 그리고,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축배. 쟝은 한바탕 구시렁대고 나서 불이 붙은 잔을 들었다. 여섯 개의 불꽃이 원을 그리며 치솟았다. 하나의 잔이 유독 낮았다. 소년은 눈치를 보다가 어른들이 불을 끄고 술을 들이켜는 걸 보고는 그를 따라 불을 껐다. 높은 도수의 술에 표정을 찡그리는 어른들의 얼굴을 보며 소년은 눈을 반짝였다. 소년은 심호흡을 하고는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소년은 잔을 입에 붙인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딘은 진즉에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딘은 키득키득 웃으며 얼어 있는 소년에게서 잔을 빼앗았다.


“역시 대도가 될 사내야.”


그를 본 쟝이 딘과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카리브는 놀라서 소리쳤지만.


“담배는 몰라도, 술은 아직 일러.”


딘은 공중에 떠 있는 소년의 손을 툭툭 치며 말했다.


“담배는 몰라도? 두 사람 진짜 안 되겠네요.”


카리브가 딘의 손에 들려 있는 소년의 잔을 멀찍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세 사람을 바라보던 제리가 말을 얹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카리브 씨. 이 험한 시티에서 대도가 되려면 술과 담배 정도는 일찍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카리브는 탄식했다.


“보수적인 사람이었네.”


쟝이 말했다. 딘도 거들었다.


“그러게. 예술 하는 사람들은 보통 진보적이지 않나?”


“저 진보적인 사람 맞고요. 예술 하는 사람이었던 것도 맞고요. 타투이스트로 전향한 것도 맞고요. 다 맞는데요, 당신들이 너무 드세요. 순수한 애를 갖다가 왜 타락시키려고 하는 건데요? 쟤를 봐요.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그 말은 남자들의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여자로는 페퍼가 있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있는 사람이니까. 제리가 선두로 가장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딘과 쟝이 카리브를 쏙 빼놓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들었어?”


“들었어, 들었어.”


“정말로 내가 들은 게 맞아? 얼마나 예쁘고…”


“네가 들은 게 맞아.”


“이런.”


“여자들이란.”


“저놈이 어려서 그렇지 조금만 나이 들어 봐, 저런 소리 하려야 할 수 없을걸.”


“내 말이 그 말이야, 딘. 여기 바글거리는 노인네들을, 아니지, 당장에 타투 받으러 오던 사람들을 떠올려 봐요. 그 사람들이 예쁘고 사랑스러웠어요? 크하하하.”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고기를 썰던 카리브는 소리가 나도록 나이프를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진짜 저질이야.”


그리고 이 세상의 온갖 인상을 번갈아 쓰며 말을 이었다.


“그런 비유가 어딨어요? 도대체. 나이가 다르잖아, 나이가. 얘가, 어? 이렇게 귀여운 애가 그들처럼 큰다고요? 오케이. 그럴 수 있다고도 쳐요. 그럼, 이 귀엽고 착한 애를 그런 우락부락한 짐승으로 키운 사람은 얼마나 쓰레기인 거예요? 말해 보세요.”


쟝이 육즙이 흐르는 고기를 크게 베어 물며 대답했다.


“그건 키우는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카리브 씨.”


“그럼요? 뭐가 문제인데요?”


입에 음식을 잔뜩 머금은 쟝은 딘과 제리를 한 번씩 바라보고는 입을 틀어막으며 웃었다. 도저히 대답할 상황이 못 된다는 구원의 요청 같았다.


“카리브 씨.”


제리가 고기 조각을 잘게 자르며 말했다.


“뭐가 문제라기보다는…, 사내놈들이 다 그렇습니다. 남자아이인 경우엔 특히 더 그렇죠. 카리브 씨를 빗대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 인생에서 그런 부모들을 몇 차례 보았습니다. 아들을 마치 딸 키우듯이 키우는 부모들을요. 어릴 땐 당연히 귀엽고 사랑스럽죠. 어린애가 귀엽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인데…,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카리브 씨. 사내는 결국 사내일 뿐이에요.”


그리고 제리는 잘게 썬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을 끝맺었다.


“본성이죠.”


카리브는 제리의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말이 길기도 길었고, 논리적이었으니까.


“알겠어요. 이 얘기는 그만하기로 해요. 재미없어요.”


카리브의 말을 끝으로, 남은 시간은 다른 이야기들이 오갔다. F구역에서의 탄생, 왕년, 추억. 그들의 말소리를 듣고 있자니, 단순히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에 화가 껴 있었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는, 그런 이야기. 개개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남은 사람은 페퍼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녀는 꾹 다문 입술로 딴청을 피웠다. 괜스레 술잔 위의 촛불을 멍하니 본다든가, 기름이 묻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있다든가, 다들 조금은 기대를 하며 기다리는 눈치였는데, 끝내 페퍼는 자기 이야기를 단 한 단어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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