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남매 대학교육, 시집장가 다 보낸 마 여사네 집 한 채의 마법
4. 가난해도 부자의 줄에 서라
지금은 고층빌딩 즐비한 강남이지만 당시에는 논밭에 돌산까지, 주변이 허허벌판과 다름없었다. 마 여사는 대출을 좀 끼고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강남의 2층집을 매수하였다. 2층 전체를 남에게 세주는 조건이었다. 1층에도 커다란 방이 3개나 있었지만 짐 보관, 난방비 문제 등으로 인해 마 여사네 가족이 실제로 사용한 방은 안방 하나 뿐이었다. 남부럽지 않은 대형 평수의 고급주택이었지만, 안방 한 칸에서 온가족이 먹고 자는 그 곳에서의 삶은 가난하기만 했다. 한창 먹을 때인 오남매는 2~3일에 쌀을 한포대씩 동냈고, 마 여사는 아침마다 오남매가 먹을 밥 한 솥과 국 한 냄비를 가득 준비해놓고는 멀리 외곽에 다시 차린 가게로 일을 나가야 했다. 남편의 부재 속에서 오남매를 키우며 대출이자와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마 여사의 몫이었다.
경제적 부담을 견디지 못한 마 여사는 결국 2년 만에 집을 팔고 다시 이사를 감행했다. 이전 집보다 평수가 30%쯤 줄고 정원도 관리되지 않은 그런 집이었다. 그렇지만 강남 내에서의 이사였고, 입지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곳이었다. 방이 총 세 개였는데 중학생인 큰 딸이 부엌 옆에 딸린 작은 방을 혼자 쓰고, 다른 두 딸이 작은 방을 함께 쓰고 나면, 막내 딸과 아들은 안방 이외에는 지낼 공간이 없었다. 두 아이의 책상은 거실 한구석에 놓여졌고,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던 두 아이들은 틈만 나면 마 여사한테 집을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서 여유롭게 살자고 졸라댔다고 한다. 마 여사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사는 동네가 얼마나 중요한데, 가난하게 살아도
부자 동네에 사는 게 좋은 거야.
나는 자식이 많으니까 힘들어도 이 동네에서
버티고 살아야 너희들 대학이라도 보내지
어디 변두리 동네 가봐...
결혼도 마찬가지야. 좋은 동네에 살아야
비슷한 수준 사람 만나 결혼하지.
3년만 버텨, 2층 전세 내보내고
너희들 각 방 쓰게 해줄게.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의 생활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남 속에서의 강북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은 부유한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많이 느꼈고 마 여사는 그런 아이들을 달래어가며 비싼 강남 물가 속에서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 옆방에서 잠을 자던 큰딸아이가 연탄가스를 마실 뻔한 일이 일어났다. 죽다가 살아난 딸을 보며 마 여사는 2층 전세를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내어줄 전세보증금을 어떻게 마련하나? 고민 끝에 마 여사는 지하실을 파기로 했다. 지하에 방 하나, 화장실 하나에 거실 딸린 작은 집 두 채를 만들어 세를 놓아 건축공사비와 2층 전세보증금을 마련하였고, 3년 안에 오남매에게 각 방을 쓰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5. 마 여사의 위험한 승부
강남에서 40여년을 살며 마 여사는 강남이 빠르게 발전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사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 역에는 대형 백화점이 들어섰고, 마 여사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백화점 옥상 놀이터에 가서 놀았다. 신사역 앞에 우리나라 최초의 편의점 세븐일레븐이 들어섰을 때 마 여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 두어 정거장 거리를 걸어가 스노우아이스를 사주었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집앞 논밭은 고급 빌라로 바뀌어 있었고, 지하철역 근처 낡은 연립주택 자리에는 어느새 CGV 영화관이 들어섰다. 마 여사는 연립주택이 헐값이었을 때 하나 사두지 못했다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버스만 다니던 강남구청, 청담동, 논현동 부근에도 지하철역이 촘촘히 세워졌고,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는 젊은이들의 메카가 되었다. 대학생이 된 마 여사의 아들은 강남에 산다는 이유로 '오렌지'라고 불리며, 성적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장학금 명단에서는 제외되었다.
어느 날, 마 여사는 강남 안에서 또 한 번의 이사를 감행하였다. 경매받은 단독주택을 사서 그 집을 부수고 다가구 주택을 짓기로 한 것이다. 살던 집은 아직 팔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 여사는 어떻게 경매 받은 집을 사게 되었을까?
하루는 부동산에 들렀는데, 한 구석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고 한다. 사연인즉슨, 남편 사업이 망해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서 간신히 보증금을 내고 다시 그 집을 낙찰을 받았는데, 납부기한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경매대금 낼 돈이 없어 보증금마저 날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자의 집은 지하철역 5분 거리에 대로변 바로 뒷집으로, 주택가 속에 파묻혀 있던 마 여사네 집보다 입지가 더 좋았다. 여자는 부동산에서 처음 본 마 여사를 붙잡고 제발 자기 집을 사달라고 울며 애원하였고, 마 여사는 다시 한 번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였다. 살던 집도 안 팔린 상태에서 대출을 받아 그 집을 사기로 한 것이다. 당시 마 여사가 받은 대출에는 부동산 사장님이 중계한 연리 20%대의 고금리 대출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원래 30%대였던 이자를 쩐주와의 담판을 통해 낮춘 것이었다. 40대의 나이에 홀로 힘들게 오남매를 키우는 마 여사의 스토리는 60-70대 쩐주 아주머니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마 여사가 경매 받은 집을 산 데에는, 그 집을 다가구주택으로 지어서 노후대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컸다. 4층짜리 다가구주택을 지어 1-3층을 세 주고 4층에서 산다면, 실거주를 해결하는 것 이외에도 '전세금'이라는 목돈을 융통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다행히 마 여사가 살던 집은 두 달 후 무사히 팔렸고, 다소 위험했던 마 여사의 승부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집 매수차액과 건축비는 1-3층 전세주고 받은 보증금과 가게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메울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집이 바로 안 팔렸다면? 당시 2억 5천만원 빌리는 대가로 월 450만원씩 내야 했다던 그 고금리 대출이자를 마 여사가 어떻게 계속 감당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은 4층짜리 다가구주택은 두고두고 마 여사한테 효자 노릇을 했다. 오남매대신 말이다.
6. '집 한 채'로 오남매 대학 가르치고 시집장가 보내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마 여사가 살아가는 방식은 좀 불가사의했다.
나는 맞벌이를 하고 있어도 아이 두 명도 키우기 버거운데, 홀로 가게에서 장사하며 오남매를 키웠다고? 더구나 다가구 주택을 지을 무렵에는 가게를 팔고 장사마저 접었기에 이후 마 여사에게는 별다른 소득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 여사는 오남매를 대학 교육 다 시키고, 시집장가를 다 보냈다. 마 여사 말대로 좋은 동네에 산 덕분인지, 오남매는 다들 서울의 이름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비슷한 환경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다.
이제 마 여사가 집을 지은 지도 30여 년이 지났다. 여전히 마 여사는 소득이라고는 없다. 그 흔한 연금 하나 안가지고 있다고 하시니.. 자식이 다섯 명이나 있어도 다들 자기 아이들 키우며 먹고 살기에 바빠 마 여사에게 생활비는커녕 용돈 드리기도 빠듯한 형편 같다. 그래도 마 여사는 아침 수영을 마치고서 같이 근처 옷가게라도 들르게 되면 늘 아들딸들, 손주들 옷 고르기에 바쁘다. 수영반 친구들에게도 늘 반찬을 만들어다 주고 가끔 맛있는 점심도 사주시는 등 베푸는 삶을 살고 계신다. 도대체 마 여사는 무슨 돈으로 살아가는 걸까?
비밀은 인플레이션에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집값, 임대료등은 오르게 되는데, 이러한 인플레이션 덕분에 ‘다가구주택’이라는 자산을 보유한 마 여사는 노동소득 없이도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다가구주택 1-3층이 100% 전세였지만, 차츰 임대료가 오르면서 기존의 전세보증금에 더해 약간의 월세 수입이 생겨났다. 물론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어서 은행 대출, 마이너스 통장도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고, 임대차 재계약시 전세 보증금이라도 올려 받게되면 일시에 갚는 방식으로 생활을 꾸려나간다고 한다. 하루도 다가구 주택의 모든 가정들을 위한 기도를 빼먹지 않는 마 여사는 임차인 사정을 고려해 임대료를 저렴하게 해주는 편이었다. 그래도 임대료는 시간을 두고 꾸준히 올랐고, 다가구주택은 마 여사의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 되어주었다. 30여년이라는 시간을 재료 삼아 가파르게 오르는 강남 집 값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