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섭섭해, 다섯 살 아들아!
한 순간, 소소한 나만의 생각의 세상.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는 나는
평범한 장면 속에서 작은 주제를 가지고,
나도 모르게 ‘생각의 세상’으로 잠시 빠져든다.
때론 장난스럽게, 어쩌면 매우 무겁게?
일하는 식당에 꼬마손님이 아빠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섰다.
소바 한 그릇과 유부초밥을 주문하고는 카운터석에 나란히 앉아서 기다리는 아이는 참 얌전하고 예뻐 보였다.
아이를 본 순간도 잠시,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북적였고, 나의 시선은 아이에게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계속해서 밀려들어오는 주문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내게 문득 아빠 손님의 큰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 너 진짜 너무하다! 아빠한테 사과해!”
5살 아들에게 건네는 훈육이 아닌, 투정 섞인 귀여운 말투였다.
이에 꼬마손님이 답했다.
“아빠가 더 너무해! 나는 아빠한테 실망했어!”
심각한 대화내용과 맞지 않은 귀여움이었다.
그렇게 둘은 가게를 떠나기 전까지 한참을 투닥거린다.
이 앙증맞은 다툼의 끝은
“잘 먹었습니다!” 하며 아이가 도망치듯 배꼽인사를 하며 먼저 일어나면서이다.
“너 아직 아빠한테 사과 안 했어 “
라며 아빠손님이 뒤따른다.
나는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마워요”라고
전하며, 어느덧 아빠 손을 꼭 잡은 아이의 반대손에 캐러멜을 손에 쥐어주었다.
친구 같은 부자사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기분 좋은 손님들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는 순간
‘스르륵...’
어느덧 나는 ‘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깊은 ‘내 생각의 세상’을 방문한다.
최근 들어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눈에 담고는 했다.
개인적으로 결혼은 하되, 아이는 갖지 않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사람이다.
이혼가정 속에서 자란 나는 부모가 주는 상처와 아이가 받는 고통의 크기에 대해 자주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쓸쓸한 나를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위로하고 보듬으면서, 자연스레 나의 아이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랬던 나인데, 조금씩 아이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정확히는 아이와 함께하는 ‘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최근 사람들의 관심사는 하나같이‘나‘이다.
과거 사회와 공동체, 소속감에 목숨 걸었던 것과 달리 현대인들에게는 ‘나’ 즉, 본인이 가장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나에게 더 투자하고,
어떻게 하면 나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이 아닌 ‘나’라는 혼자만의 미래를 그린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가족이라는 존재와 자녀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게 된 것이다.
나 또한 아이가 자유롭고 행복한 내 세상의 걸림돌이 되리라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이런 끝없는 생각들을 반복하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는 것을.
행복한 아이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는 한다.
이 웃음은 사랑이라는 마음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실은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인간적인 미래를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마음이 너무 크기에,
아이라는 존재가 주는 따뜻함을 어렴풋이 느끼기에 되려 무겁다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고,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또한 따뜻한 사랑을 주는 배우자가 되고 싶었다.
가정에 완벽한 가장이 되고 싶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욕심을 품기에,
그렇기에 아이를 낳는 게 두려운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싶다.
최근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 애쓸 필요 없다고
지레 겁먹고 두려워 말라고.
소중하고도 작은 내 아이에게 진심으로 섭섭하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처럼,
아이를 한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대하고, 사랑을 전한다면, 나도 내 아이도 조금 더 따뜻한 사람으로서
성장하며 서로의 삶을 그려나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까지 도달했다.
우선 결혼은 할 수 있을까...?라는 현실로 돌아오면서 말이다.
두 손님에게서 나는 오늘도 작은 위로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