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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움 Jul 24. 2023

나무처럼

영화 [유리정원] 읽기

영화 <유리정원 Glass Garden>의 재연과 지훈. 그들은 순수해 보인다. 그들이 순수해 보인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렇다. 지훈은 무명작가인데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에게 표절문제를 제기한다. 표절로 거장의 반열에까지 오른 것을 알면서도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거장을 건드린 것이다. 거장이라는 분이 먼저 지훈의 자존심을 건드리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지훈처럼 행동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훈은 순수해 보였다. 잘못된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지훈은 표절은 안 했고 안 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재연은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인데 후배에게 자신의 연구아이템을 도둑 맞고 사랑했던 사람마저 빼앗긴다. 재연이 발표한 아이템에 대해 발표회장 참석자들은 필요한 연구이지만 1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모른다며 외면한다. 그녀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믿었던 사랑했던 정교수마저도. 아이템 발표회장 참석자들은 훔친 아이템으로 좀 더 실용적인 연구아이템을 내놓은 후배에게 관심을 갖는다. 재연은 100년이 걸리더라도 필요한 연구라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순수해 보였다. 실용적인 아이템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필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해야 할 필요한 연구를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지훈과 재연. 그들이 지키려던 순수라는 가치는 소중해 보인다. 지키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것 때문에 더 소중해 보이는 것이다. 순수의 소중함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순수를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가는 이유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훌륭한 작품을 쓴다거나 대단한 연구에 성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살기 위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거장을 건드린 대가로 지훈의 책들이 수거되고 있다는 출판사 사장의 투덜거림이나 영업사원이 되어버렸다는 정교수의 말처럼 순수는 생존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술적인 작품을 쓰는 것보다 표절 거장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인류발전에 기여하는 연구보다 돈 되는 프로젝트를 훔쳐내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순수는 더 이상 지켜서는 안 될 바보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면, 살아남기 위해 아니 살아남는 것과 관계없이 본래 그런 것이었든 어쨌든, 이제 순수가 그런 것이라면 소수의 순수한 이들이 사회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면, 그들이 다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순수한 이들은 사회 부적응자나 광인이나 병든 자로 살다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면 순수의 의미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 재연의 말처럼 아직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순수했던 이들은 오염되어 버렸다. 순수했기에 오염되기 쉬웠던 것이다. 지훈도 마찬가지다. 순수했기에 그 바닥에서 쫓겨나고 여자 친구로부터 버려졌다. 순수해서 상처받다 보면 살아남기 위해 순수를 버리게 된다. 지훈도 자신의 욕망에 재연을 가둬버린다. 그도 유명작가가 되어 살아남겠다는 욕망에 갇혀 순수한 재연을 이용했을 뿐 재연을 지켜주지 못했다. 뒤늦게 잘못했다고 다시 쓰겠다고 재연을 붙들고 울어보지만 이미 그녀의 순수는 오염되어 버렸다. 오염된 순수를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재연은 연구를 통해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재연과 같은 순수를 지키려는 이들이 살아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나무들은 가지를 뻗을 때 서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다른 방향으로 자라나지만 사람은 안 그래요.” 나무에서 태어난 재연은 다시 나무가 되었다. 재연처럼 순수하게 살다 나무가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나무처럼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2017.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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