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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an 30. 2024

어느 날 문득 대형견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은 첫 만남


강아지와 고양이 어떤 동물을 좋아하세요?


누군가 내게 물어온다면 나는 늘 고양이 편이었다. 반려 동물로 고양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생소했던 20년 전부터 부득부득 고양이를 키워왔을 정도로 도도하고 아름다운 그 생명체를 사랑했다. 마음을 쓰며 가족같이 키워 온 고양이를 혹독한 피부병 끝에 하늘나라로 보내고 혹여나 동물을 키운다면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짧은 털을 가진 작은 아이를 택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뜻대로 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절미.

말캉말캉, 보들보들, 달콤한 맛에 복슬복슬한 아기 엉덩이마냥 보얗고, 달덩이처럼 동그란 그것이 어느 날 내 삶에 걸어 들어왔다.


작년 겨울 출장 다녀온 남편의 손이 묵직했다.

"그 큰 가방은 뭐야?"

시험에 든 학생의 표정으로 쭈뼛거리던 남편은 대답하지 않고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우다다다... 인절미 한 마리가 내 품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얘 이름은 심바야. 아이들이랑 미리 이름을 지어뒀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기로 약속했거든!"

이게 무슨 귀신 인절미 찜 쪄먹는 소리인가. 마땅히 부부라는 것은 가정 안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동등한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그 과정을 공유하며 원활한 의사소통에 의해 집안 대도사를 결정하는 존재들이어야하지 않는가? 특히나 이런 대형견을 들이는 과정에서는 더욱더 깊고 세밀한 논의와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은 머리도 들어가지 않는 집.


그러고 보니 문득 어느 시점부터 골든 레트리버를 키우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곤 했었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내가 언젠가 우리나 나이 들면 정원 있는 큰 집에 살면서 키우자 하며 웃어넘기곤 했었던 것도. 그 언젠가가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더 단호하고 명확하게 거절했었어야 했다며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사람 좋아하는 레트리버답게 처음 본 내 무릎 위에 올라앉아 부비적 부비적 살결을 비비며 손가락을 할짝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혼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애절한 눈빛으로 내 허락을 기다리는 6개의 눈망울과 이 세상 귀여움을 모두 합쳐 만들어진 듯한 생명체 앞에서 나는 차마 거절을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내 삶에 불러올 커다란 파장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유아기를 넘어가며 조금씩 삶을 되찾고 있었던 2022년의 겨울이었다. 늘 바쁘기만 했던 워킹맘의 삶에도 커피 한 잔 정도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화장실에서 나를 찾지 않았고 밥을 먹는 것에서도, 옷을 입는 것에서도 혼자 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고 있었다. 지난 10년 나를 잃고 엄마로만 살아온 삶에 조금씩 틈이 생기고 있었다. 육아보다 힘든 일은 없을 거라고 이제 큰 고비를 넘어서 새로운 장이 펼쳐지리라 기대했었다.


2022년 12월 21일 나는 정말로 새로운 인생의 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펫샵에서 어미의 사랑과 훈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기 강아지는 배변 훈련도,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채 충만한 에너지로 집안 이곳저곳을 카오스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한 달도 안 되어 소파는 껍질을 탈피하고 뽀얀 맨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에어컨 배관은 군데군데 끊어져 나뒹굴기 일쑤였다. 오줌과 똥은 어딜 가나 부려져 있는 옵션 같았고 벽지는 귀신의 집처럼 너덜거리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새벽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면 아이들 로션이 거실 바닥에 생크림처럼 치덕치덕 발려져 있기 일쑤였고 이갈이 시기 우리 가족의 손과 발은 늘 피투성이었다.


그러나 저지래는 끝나지 않습니다.


 일하다 집에 와도 허리 한 번 펼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거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도, 집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티브이를 보면서 간식을 먹는 것도 이제는 모두 금지되어야 하는 일상이 되었다. 억지로 품위를 지키고 입을 꾹 다물었던 잔소리도 포효가 되어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거 얼른 치우고 너희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 닫아 어서! 엄마가 여기서 과자 먹지 말랬지! 아빠가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끝이 없는 집안 일과 상처로 얼룩진 나는 점점 변해가고 있었고 현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급속도로 자라나는 그의 힘과 무게는 끝끝내 잡고 있던 마지막 힘과 존엄성마저 잃게 하고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있었다.


우리 이혼할까?


결혼 10년 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은 심바 데리고 시골 가서 살아. 나는 여기서 애들 건사하며 살아갈게. 우리 헤어지자."

남편은 말이 없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지쳐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조그마한 가시에도 터져버리고 말 것 같았던 나날이었다.


함께 하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


불행인 듯 다행인 듯 동물의 시간은 사람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1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홉 살 아들과 피 터지게 싸우던 아기 강아지는 어느새 아이를 너그러운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성견이 되었다. 위태했던 우리 부부도 한바탕 커다란 성장통을 겪고 조금 더 느긋한 어른이 되었다. 시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것에 이제야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이때까지의 나는 70년대 미국 드라마에서 봄직한 깨끗한 집에서 살면서 땟자국 하나 없는 깔끔한 옷을 입은 아이들과 계획대로 일상을 꾸려 나가며 모든 일을 그림처럼 처리해 나가는 어떠한 이미지에 매달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멀고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며 그곳에 도달하고자 안달하던 나는 역풍이 불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몸을 돌려 내가 가진 것에 눈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절대로 내가 좌우할 수 없고 계산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 천진한 눈빛으로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본 사람은 절대로 그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호칭은 관계를 규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강아지에게 '엄마'라는 호칭을 내어주었던 순간부터 나는 이제 그의 삶을 책임지고 무제한적인 사랑을 베풀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무게로 버텨야만 하는 1년의 시간이 지나자 나에게는 넓은 등을 가진 듬직한 존재가 생겼다.


등 ; 동물은 평화롭고생선은 푸르며 사람은 애처롭다.
김소연 作 <한 글자 사전>  


나의 강아지에게는 넓은 등이 있다. 기댈 수 있는 너그러운 등이 있다. 이혼 위기와 우울증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게 했던 그에게서 위로와 사랑을 받는다. 지켜줘서 고맙다고 나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는 그에게서 나는 오늘도 사랑을 배운다.


1년이란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또 다른 가족을 잉태하기 위한 출산과도 같은 통증을 겪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인간 아닌 존재와 살아갈 수 있는 인격체로 거듭나기 위한 성장통이었다.


나에게는 기댈 수 있는 넓은 등이 있는 개가 있다.
평화롭고 믿을 수 있는 그 등에서 나는 요즘 편안한 숨을 쉰다.
누구도 깨지 않는 새벽 나의 발치를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와 함께
나는 일상의 또 다른 도전들을 뚜벅뚜벅 걸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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