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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사건

by 은조

토요일, 하남 미사에서 복싱 대회가 있었다.

대회가 열리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들어가야

한다는 걸 매번 옆에서 보며 느끼는데, 이날도 역시나 그랬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고 준비해서 나가는 남편을 보며-


남편은 차를 끌고 갔다. 평소에 차를 모셔만 두는 편이라 시동이 걸릴까 걱정됐지만 금방 연락이 오지 않는 걸 보니 시동이 걸린듯해 마음 놓고 한숨 더 잤다. 새벽부터 나간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너무나도 달콤한 꿀잠이었다.


나는 이날, 남편의 일정으로 인해 남편이 매주 하는 1시간

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해야 했다. 초등학생 아이들 대상으로 운동을 알려주고 하는 것인데 전문가가 아닌 내가 알려줄 순 없으니 약간 레크리에이션 느낌으로 했더니 모두가 즐겁게 만족하며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비록, 끝나고 난 뒤 나의 정신은 뭔가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옆에서 보던 아들은

아빠는 매주 그러는데 얼마나 힘들겠냐고 철든 목소리를 내는데 솔직히 속으론 나도 이미 남편의 놀라운 내공에 손뼉 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다음 고민은 그대로 집으로 가냐, 미사로 가는가였다.


내가 있던 곳에서 지하철 검색해 보니 1시간 정도 나오는데 심각한 길치로써 웬만하면 초행길을 혼자 다니지 않으려고 하기에, 그리고 그곳에서 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그냥 집에 편하게 있을까 하는 달콤함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놨지만 그렇다고 그냥 집에 가기엔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하고 또, 미사로 가고자 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몸은 힘들고


결정했다. 미사로 가기로!

그렇지만 혼자 가고 싶진 않았다.

음.. 심심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기다릴 때도 혼자면 좀 멋쩍고 뻘쭘하니까? 아들 녀석은 절대 따라가지 않을 걸 잘 알기에 애초부터 내가 데리고 갈 목표는 딸이었다.


같이 가자고 말하니 지하철 타곤 안 간다며 버티던 딸.

다이소에서 원하는 걸 사줘도 봤지만 가지 않겠다는 그 굳건한 마음은 쉽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됐다 싶어 그냥 집에 있기로 내 마음을 바꿔 가는데 내 얼굴이 좀 안 좋았는지 어쨌는지 그냥 미사로 가겠다는 딸아이.


그렇게 시작된 지하철 사건-


첫 시작은 언제나처럼 좋았다.

심지어 낮의 날씨도 따뜻해서 별 수고스러움 없이 지하철역 도착 정신 바짝 차리고 탔고 첫 갈아타는 것도 잘했고 운이 좋게 자리가 계속 비어 있어 딸아이가 대부분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한 부분들로 인해 마음의 긴장이 풀어진 것일까? 계속 타고 가다니 결국 5 정거장 정도 지나서야 이 길이 아닌데 싶었고 그렇게 부랴부랴 내려 건너편으로 막 건너가는데 혹여나 딸아이 놀랠까 아무 일도 아닌 척 애쓰며 다시 반대로 지하철을 탔고 그제야 다시 길을 찾아보니 하남검단행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


그래, 이제 알았으면 됐지.

중간에 내리고 다시 갈아타는 곳 무사히 찾아 도착.

오는 지하철을 탔는데 또 반대로 가는 지하철……

또 내렸고 또 반대로 가서 또다시 돌아온 길로 돌아가기 위해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나도 모르게 정말 깊은 단전에서

올라오는 깊은 한숨이 터져버린 것.


시간을 보니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나있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본능적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옆에 있는 딸아이가 보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 옆에서 괜히 괜찮다고 가면 된다고 한숨 쉬지 말자며 혼잣말을 하는데 그 순간 딸아이는 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래, 엄마 한숨 쉰다고 해결되는 거 없잖아 해결되면 한숨 쉬어도 되는데 그러니까 한숨 쉬지 마 가면 되지라며 오히려 나를 달래주는데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하며 걷고 내리고 다시 타고를 반복하면서도 딸아이는 힘들다 어쩐다 짜증 한번 나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을 우여곡절 끝에 결국 도착하고

나서 편의점을 가자고 했고, 그제야 진심을 꺼내논다.


엄마, 나 고생했으니까 과자 사도 되지? 그럼!


남편의 얼굴을 보고 안심도 되면서 왔던 과정들이 생각나서 이게 뭔가 싶었지만 어쨌든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는 남편이 있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딸아이와 있을 때 너무 재밌고 행복하다는 걸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던 아주 귀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다음날, 일요일-

그림일기를 쓰는 딸아이의 일기 제목은 지하철 여행-

나는 그날을 사건이라고 표현하는데 딸아이는 여행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또 뭉클 힘들었지만 괜찮았다고 재밌었다고 말해주니 더 성장했구나 싶었다.


물론, 일기 내용 속엔 지하철 내용은 없고 복싱대회 이야기들로만 채워져 있었지만 어쨌든 여행이라고 행복이라고 표현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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