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수신음이 들렸다.
‘베를린 장애인 마라톤 통역 급구’
발신인은 예전에 함께 일했던 방송 작가다.
일정은 주말이라 무리 없다. 수업을 빠지지 않아도 되고.
‘네, 작가님. 가능합니다.’
이미 함께 일했던 곳이라, 내 이력서를 갖고 있어 편하다.
약속 장소인 테겔 공항에 가자, 한국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아무 말 없이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님 그 반대인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통역하시는 분이에요?”
“네. 그쪽도?”
통역이 둘이 필요한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마라토너 두 명이라, 각각 한 명씩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난 형민을, 남자는 나이가 좀 많은 시원의 통역을 맡았다.
처음 장애인 마라토너를 만나 좀 긴장했지만, 이내 두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제가 말씀드렸죠? 정상인 보다 훨씬 낙천적입니다. 오히려 비장애인이 더 우울하고 힘들어해요.”
한국 담당자가 메일에 적은 말이 떠올랐다.
“난 통감자로, 양파 수프!”
두 사람은 베를린이 익숙한 듯, 스테이크를 먹는 식당에서 착착 메뉴를 시켰다.
선수들이 훈련할 때는, 남자와 둘이 남았다.
“어디 대학 다녀요?”
“베를린 공과 대학이요.”
“어, 나도 그런데. 무슨 과?”
통성명한 뒤, 우리는 어느새 서로의 연애관까지 이야기했다.
“여자에겐 무조건 표현해야 해요. 최소한 표정이라도요.”
현종은 정애 언니와 연애 중이었다. 나에게 연애 비법을 전수하려는 것일까. 연애 이야기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훈련이 끝나 있었다.
온종일 운동선수를 쫓아다니니, 몸이 녹초가 됐다.
“무슨 음악 들어요?”
내가 묻자, 시원이 내게 이어폰을 꽂아 주었다.
이어폰 속에서 귀에 익은 팝송 ‘I believe I can fly’가 흘러나왔다.
시원의 다리를 보면서, 팝송이 슬프게 느껴졌다.
“로운 씨도 꼭 날아요! 나처럼!”
결승선에 도착한 시원은 물을 마시며 나한테 말했다.
그는 휠체어 마라톤 국가대표 선수로 꿈을 이룬 채 훨훨 날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모습은 내 눈에만 보였던 것 같다.
그는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한국으로 떠났다.
“수고했어요.”
“그쪽도요. 연애 잘하시고요!”
몇 달 후, 현종이 정애 언니와 헤어지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처럼 놀만한 것도, 재미있는 것도 찾기 어려운 독일 유학생 사회에서, 타인의 연애사는 빠르게 퍼졌다.
“네 여유 있는 모습이 가장 큰 매력이야.”
나한테 말했던 정애 언니의 뒷모습은 여유롭지 않고 쓸쓸했다.
정애 언니의 뒷모습을 보니, 현종이 어떤 표정으로 이별을 드러냈을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