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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쌀한 첫 발표날(16)

by 베를리너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베를린 시립 도서관의 지정석에 앉았다. 카페에 가면 구석진 자리를 찾듯, 도서관에 오면 맨 먼저 달려오는 조용하고, 친숙한 자리다. 눈을 들면, 몇백 년 된 철학자들의 저서들이 책장에 앉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집중력이 떨어져 옆을 돌아보면 창밖으로 울창한 숲이 보인다. 나무는 바람 속 잎을 흔들며, 나에게 뭐라 말을 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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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아, 다음날 있을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시작했다.

통계학 과제는 벤이 알려준 대로 문제를 푼다. 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주말엔 그를 만날 수 있다. 아니 그와 함께 일할 수 있다. 나에게는 일보다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자, 칠판엔 내가 준비한 핸드아웃 화면만 환하게 비쳤다.

알렉산더 교수님의 표정이 어둡다. 말할 때 콧수염을 실룩거리는데, 그건 기분이 좋지 않다는 증거다.

노동자 출신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교수까지 된 그는 자존심이 강하다. 그만큼 학생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니나가 내용을 봐주긴 했지만, 처음으로 혼자 독일 학생들 앞에서 발표한다니 무척 긴장됐다. 교수님의 표정이 굳어 있어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마쳤다.

“그래서, 사회 계층 간 이동이 어려워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지?”

교수님이 뜻밖에 질문을 던진다.

“예?”

준비된 내용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답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하얘진다.

독일 학생들의 눈이 내게 집중돼 있다.

“제 생각엔 사회 계층 간 갈등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황해서 들고 있던 노트를 떨어뜨리자, 누군가 대신 대답했다.

벤이었다.

“그래, 계층 간 갈등이 심화한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교수님은 벤에게 관심을 돌렸다.

“휴.”

난 교수님 앞에서 또렷하게 의견을 발표하는 벤의 모습을 보며, 안도와 동시에 부러움, 고마움까지 느꼈다.

짧은 순간에 그를 향한 마음이 훌쩍 커지는 순간이었다.

“벤의 의견, 참 좋았어!”

리자가 자리에 들어오는 나를 뒤로하고, 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발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녀 다운 반응이었다. 난 며칠을 준비한 발표 자료를 조심스레 품에 안고 강의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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