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핑(安平)/안핑슈우(安平树屋), 안핑요새(安平古堡 ) Day 4(3)
“하얗고 높다랗고, 빨간 뾰족 지붕이 있고, 또 바다가 있는” 상견니의 그곳. 안핑.
남자 주인공이 길 잃은 여자 아이에게 너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하얗고 높다랗고, 빨간 뾰족 지붕이 있고, 또 바다가 있어요”
一个白白的 高高的 红色尖尖的屋顶, 还有海。
남자 주인공이 잠시 생각하다가 “안핑?”이라고 물어본다. 그리고 안핑으로 가서 아이의 집을 찾아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그 장면이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고, 남자주인공이 잘 생겼다(!).
안핑에는 관광명소들이 많이 모여 있기 때문에 타이난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라면 꼭 들러보는 곳이다. 내가 이곳에 꼭 와보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근래에 너무나 재미있게 봤던 대만 드라마 <상견니想见你>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너무너무 기대했던 바로 그 “안핑”에 오전에 체력을 거의 소진해 버린 어린이와 함께 왔다.
“아니 이 동네 사람들은 밥도 안 먹고사나?”
짐짓 화내는 척, 큰소리를 치면서 눈은 재빠르게 동네를 스캔한다. 어느덧 3시.
아침부터 간식류만 먹었으니 아들의 에너지가 제대로 방전된 상태. 주변에 식당이 안 보인다. 날씨는 왜 이리 더운 건지.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유명한 맛집이 있다는데 먼 맛집보다 가까운 일반 식당이 절실한 순간이다.
그때 엄마의 눈에 포착된 스파게티 광고판. 아들이 제일 사랑하는 음식 스파게티. 저거다! 화살표를 따라가니 골목 안에 숨어있던 가게(食味三千)가 보이고, 후다닥 들어가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덥고 힘들어서 늘어져 있던 아들도 에어컨 바람과 스파게티에 기분이 좋아져서 연신 미소를 짓는다. 핸드폰도 충전하고 사람도 충전을 하자. 스파게티는 원래 기본으로 어느 정도 맛있지만 지금은 맛없어도 맛있었을 것 같다.
첫 번째 장소는 안핑슈우(安平树屋). 영문명은 ‘Anping Tree House’이다. 트리 하우스라니 뭔가 모험과 환상의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잖아!
입장하면 우리를 맞이해 주는 것은 더지양항(德記洋行) 건물이다. 양항은 ‘서양 상점’이란 뜻으로 영국 무역상 ‘Tait가 설립한 서양 상점’이라는 의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소금 회사였다, 현재는 1900년대 안핑 지역의 발전상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그림으로 크게 입간판을 만들어 놓아 어린이 박물관 같은 분위기가 난다. 테이블, 다기, 장식장 등의 소품을 활용해 실제로 그 당시를 재현해 놓은 공간을 관람할 수도 있다. 연도를 빛으로 밝힌 어두운 복도가 인상적이다.
이 양항의 뒤편에는 창고 건물이 하나 있었다. 여기가 메인. 시대에 따라 처음에는 차를 보관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소금을 보관했고, 소금 산업이 쇠퇴한 후로는 버려져 폐창고가 되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며 이 창고는 반얀나무에 뒤덮여 원래부터 건물과 나무가 하나였던 것 같은 모습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게 바로 지금의 안핑 트리하우스다.
내부에는 나무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철제 계단을 만들어 놓아, 다양한 위치에서 이 자연의 신비를 감상할 수 있다. 위에서, 아래에서, 어디에서 봐도 멋지기만 하다. 아들은 미로 같은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자기만 따라오라며, 빨리 오라고 엄마를 목놓아 부른다.
‘엄마는 철제 계단에서 너처럼 빨리 다닐 수 없다고!’
나무에 사람들이 부딪칠까 봐 친절하게 머리 콕 방지용 스펀지를 나무에 부착해 놓은 센스가 돋보인다.
창고의 벽 한 면을 거울로 만들어 놓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아들은 거울에 자기 모습이 비취자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많이 즐겁구나. 아들.
나무집을 나와 데크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전망대는 꼭 가봐야 한다. 안핑슈우 주변의 강과 주변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또 다른, 무성한 나무에 완전히 잠식된 창고의 무시무시한 자태를 마주할 수 있다.
안핑수우를 나오면 바로 앞에 놀이터가 있다. 놀이터에 오랫동안 굶주렸던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는 놀이터에서 대만 놀이터와 한국의 놀이터를 비교해보고 싶다며 엄마에게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한다.
아유... 여기는 볼 것이 많은 안핑이라고!
어린아이들이나 놀법한 작은 규모의 놀이터에서 한참을 주변 아가들에게 민폐를 끼치고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기서 안핑요새(安平古堡 안핑구바오)까지는 10분이면 가지만, 또 가는 길 양편으로 우리의 시선을 끄는 먹거리, 볼거리들이 너무나도 많다. 시우는 과일을 넣고 굳힌 젤리를 먹으며 마술 구경을 또 한참을 한다.
거리에는 대만의 전통극(歌仔戏) 공연도 한창이다. 경극처럼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려한 분장을 한 사람들이 등장하여 높은 톤으로 대화를 나누고 옆에서는 악사들이 신명 나게 연주를 하면서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국적인 분위기에 취해 아이도 한껏 집중해서 본다.
무대 앞에 플라스틱 의자를 배치해 둔 것이 한국의 동네 축제에서 많이 보던 풍경이다.
중간중간 사람들에게 사탕을 뿌려주는 관객 친화적 공연이다. 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탕을 최선을 다해서 잡고, 또 바닥에 떨어진 사탕도 주워서 손에 하나 가득 사탕을 올려놓고 나에게 보여준다. 왜 이리 웃기는지. 깔끔쟁이 아들 맞니?
“엄마 이거 봐! 엄마 사탕 못 받았지? 내가 받은 거 하나 줄게”.
걸어오는데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서인지 막상 안핑요새에 도착했을 때는 힘들어서 못 걷겠다고 주저앉는다. 안 돼! 여기가 그 ‘하얗고 높다랗고, 빨간 뾰족한 지붕이 있는’ 안핑 요새라고! 다리가 놀이터에서는 안 아프고 관광지에 오면 아프고, 뭐 이리 선택적이라니.
안핑요새는 1624년 네덜란드가 대만을 점령한 후 10년 동안 지은 첫 번째 요새로, 젤란디아(Zeelandia)성이라고 불렸다. 요새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말랑말랑한 느낌. 대만의 영웅 정성공이 다시 수복할 때까지 약 37년간 네덜란드의 행정본부로 사용했다는데 그 당시에 정말 튼튼하게 지은 요새인지 아직까지 그 멋진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타이난 기념품에 항상 등장하는 시그니쳐 건물.
빨간 지붕의 전망대는 실제로 올라가 볼 수 있다. 전망대니까… 굽이굽이 좁은 계단을 열심히 걸어 올라가야 한다. 전망대에 도착하기 전부터 세상 느린 걸음으로 올라오시는 아드님. 틈만 나면 어디든 앉아 버린다. 많이 힘들구나. 그러면 타협을 해보자.
“그럼 잠깐만 입구에서 기다려. 엄마는 전망대 정말 가보고 싶었어. 후딱 갔다 올게”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안 그런데…)
혼자 있기는 싫은 아들. 결국 우리 1.5인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꾸역꾸역 전망대 계단을 오른다. 힘들었지만 전망대에 서면 안핑 지역을 한눈에 담을 수 있고, 우리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안핑 요새 기념품 샵에서 내가 꼽은 두 개의 키워드는 ‘네덜란드’와 ‘정성공’이다.
진주 귀걸이 소녀, 별이 빛나는 밤, 절규 같은 네덜란드의 유명 작품들을 활용한 기념품, 과자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타이난에서만 판다고 한다.
대만은 자신의 나라를 점령했던 나라에 대해서 큰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신기했다. 여행하다 보면 흔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관광 상품화 시킨 곳이 많았다. 만일 우리나라의 이순신 기념관에서 일본 벚꽃 과자, 토토로 이순신 콜라보 기념품을 판다면… 상상도 안 되는데 말이다.
대만의 영웅 정성공의 이름을 딴 ‘성공 과자’ ‘성공 맥주’도 판매하고 있다. 왠지 그런 이름의 과자나 맥주를 먹으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의미를 부여해서 선물하기에 좋겠다. 이래서 이름도 잘 지어야 하나보다.
안핑요새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카이타이티엔호우꽁(开台天后宫) 사원.
이 사원 앞에서 남자주인공과 아이가 꽈배기와 동과차를 사 먹는 장면이 드라마에 나온다. 주인공 따라잡기 하려고 이 꽈배기를 대만식으로 ‘바이탕꿰이(白糖粿)’라고 말한다는 것도 알아 두었다.
그러나. 일요일 저녁.
사원 앞에 사람이 너무 많고, 덥고, 그 ‘바이탕꿰이’ 파는 곳이 안 보인다. 이 주변에 맛있는 먹거리들도 많이 팔던데. 아이를 보니, 잡고 있는 손을 놓으면 어디든 바닥에 앉을 기세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다음을... 기약해 본다. 흑흑.
아쉬움을 잔뜩 남기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찾아본다. 아까 내린 정류장에서 15분 후 애증의 99번 버스가 도착 예정이다. 현 위치에서 도보로 버스정류장까지 7분. 탈 수 있겠다! 아이의 손을 잡고 뛰는 듯 빠른 걸음으로 간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한참 걸렸는데 빨리 걸어가니 금방 정류장에 도착했다.
잠시 후 반가운 99번 버스가 모습을 보이고. 그 타기 어렵다는 99번 버스를 하루에 네 번이나 타다니! 럭키! 혼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버스를 타는데, 엄마는 그러든지 말든지 아들은 앉자마자 말도 없이 그대로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든다. 반나절만에 꾀죄죄해졌다. 이 녀석을 데리고 어떻게 숙소까지 걸어가나 걱정도 되고 이렇게 하루 종일 군소리 없이 따라와 주는 게 대견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