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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지인 Nov 14. 2023

완벽한 루저가 되는 법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뻔한 말

‘여기 앉아있는 당신들은 모두 루저입니다!‘


이십 대 중반, 부푼 꿈을 안고 들어간 한국드라마교육원. 가장 의기충만하고 열정으로 가득 찬, 긴장과 설렘의 첫 수업에서 들었던 선생님의 첫마디였다.


‘루저라서 글을 쓰고 싶은 거예요. 행복하면 드라마 쓰고 싶은 생각 안 하죠. 만날 사람 없고 사는 게 힘드니까 드라마를 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방구석에 처박혀서 루저로 살아가세요. 드라마를 잘 쓰고 싶으면.’


2 연타 연속 직구에 정신이 번쩍 들다 못해 뇌 속이 얼얼해져 나는 한동안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90년대 국내 첫 트렌디드라마라 할 수 있는 최수종, 최진실의 ‘질투’,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던 불륜을 소재로 다룬 황신혜 유동근 주연의 ‘애인’의 최연지작가님. 그분의 그 말을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잊고 산 걸까. 왜 나는 내가 루저였다는 사실을 까먹었을까



후에 출간하신 책 제목을 보고 참 작가님 답다는 생각에 웃음이 남




난 항상 내 말이 맞았다.

네가 옳아도, 내 말이 맞았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끝장토론을 벌이는 것도,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는 것도, 영 격 떨어지는 행동이었다.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묵언수행이 절대 불편하지 않았다. 입꾹닫하고 있다 보면 결국 내 말이 맞는 게 되었고, 답답해하던 상대도 결국 내 눈치를 살폈다.


자기 합리화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견고한 논리와 내 말이 맞다는 확고한 신념.

그것은 그저 ‘겁나 잘 우기는’것일 뿐이었다.


루저이기에,

루저라서,

루저이므로

누구보다 더 승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핍을 채우려는 무의식적행동, 정신승리.



빅뱅이 부릅니다..루저, 외톨이, 상처뿐인 겁쟁이



30년 된 친구와 절교했던 것도,

마흔을 앞두고, 부모님과 안 보게 된 것도

결국 내가 옳았기 때문이다.


나를 나은 부모도,

30년 된 죽마고우도,

설령 남편도 나를 바꾸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나를 바꾼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진상손님이었다.



카페 문을 열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며 여자손님 넷이 카페로 들어섰다.

보통 디저트카페에 들어오는 여자손님들의 경우, 대걔 달달이 생각에 눈망울이 매우 초롱초롱하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일단 밝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그중 한 분이 핸드폰 사진 하나를 보여주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용인즉슨,

학교에서 단체주문으로 어머니회에게 전달된 디저트 중, 자기가 받은 스콘이 문제였는데, 누가 먹던걸 받았다는 컴플레인이었다.


‘저희는 1인카페라 상담주문도 제가,

디저트 제조, 디저트포장도 제가,

배달도 제가 직접 담당했습니다. 절대 단연코 누가 먹던걸 드릴 수가 없어요.‘ 라는 나의 항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맘카페에 올려볼까요?

맘카페에 올려볼까요?

맘카페에 올려볼까요?


그동안 인터넷 기사로, 혹은 ‘아프니까 사장이다 ‘ 카페에서, 등등 간접경험으로 많이 보고 들었던 그런 시추에이션이 드디어 나에게도 벌어졌다는 생각에 흥분과 충격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카페사장이자, 우리 매장의 고객센터이다. 고로 컴플레인에 능숙하고 현명한  a/s로 연륜 있는 으른의 대처법을 보여주자 하며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제가 미처 다 식지 않은 갓 나온 스콘을 반으로 가를 때 반듯하게 자르지 못해..


-아니 학교에 보내는 디저트를 이따위로 만들 수 있어요?!!


-제가 직접 많은 양을 배달을 하다 보니 스콘 윗부분이 안에서 흔들거리다 뒤집어져..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진짜!!


-사실 크림과 브라운치즈가..


-아니 잘못했다는 소리를 왜 안 해요?!!


-(네?!!)


그 즉시 죄송무새가 되어 ‘죄송합니다. 더 꼼꼼하게 살폈어야 했는 데’를 수없이 반복하자 그때서야 화가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태사장 이 바보! 일단 아묻따 죄송하다 잘못했다 하면 되는 것을!!

그렇게 된 연유 내지 자초지종과 상황설명 따위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인 것을, 손님이 그걸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그때 알았다.

그동안 나는 지금까지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구나, 내가 원하는 순간에, 내가 하고픈 말만 하고 살았다.


말의 낭비 없이 인사치레소리 하지 않는, 가식 없고 진지한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것이 나다움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주고 싶다.

너무나도..


난 누차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를 반복하고 그녀들은 누차 재발방지를 당부하면서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커피를 권했다.

그녀들은 커피대신 제주레몬에이드를 요청했다.


나는 그녀들이 원하는 음료를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훈훈해진 모양새로 그녀들이 카페를 나서자,

나는 한동안 진이 빠져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훈훈하고 아름다운 결말이었지만, 내 영혼은 털털 털려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도 누가 4명이서 나를 에워싼 적은 없었다.


나중에 퇴근 후 카페에 들른 남편이 이전상황을 cctv로 돌려보고나더니, 내게 ‘힘들었겠네’하는 말을 건넸다. 내가 혼자 쿠키반죽을 몇백 개를 만들어도 힘들었겠네 하는 말을 하는 적이 없던 남편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하룻밤 새 케이크 30개를 완성시켜야 했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날이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작은 동네카페의 미래를 결정지을 만한 중대사와 같은 사건의 크기에 비해 아주 깔끔한 결말이었다.


죄송합니다와 레몬에이드 4잔 서비스로 다시 이전과 다름없는 카페의 보통의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졌기 때문이다.


이 디저트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댁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이게 원래 하면서 내가 상대보다 전문가임을 과시하고,

나는 꼼꼼하기 때문에 결단코 이런 실수를 할 리가 만무하다고 무결한 완벽함을 강조하고,

올릴 테면 올려봐라 나도 가만히 좌시하지 않겠다며 도리어 겁박하지 않음으로,

나는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 소모를 막고, 소중한 일상을 지켜내며, 이전보다 더  높은 완성도의 디저트를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이렇게 브런치에 그땐 그랬어하며 쓸 수 있는 작고 소중한 에피소드를 얻을 수 있었다.



부부관계에서도

부모자식 간에도

친구사이에서도

졌더라면… 어땠을까

더 많은 것을 얻었을까?

무언가를 지켰을까?


져도 지는 게 아니었음을,

루저는 루저가 아님을

완벽한 루저가 되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암쏘쏘리, 고멘나사이,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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