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아일랜드에 살면서 나에게 집이란 공간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삶에 있어서 중요한 척도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살았던 집들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아래는 내가 아일랜드에 막 도착했을 시절 소망하던 꿈의 집을 혼자 메모장에 적어 본 내용이다.
화장실이 깨끗하고, 내방이 따로 있으며 창문너머로 바깥풍경을 볼 수 있는 곳.
책상이 있고 부엌이 넓으며 앞에 잔디가 있고
한국인들이 많지 않은 곳
최대 5명의 사람들이 사는 곳
- 2019.02.15 Lucan에서
이것이 바로 내가 첫 보금자리를 찾던 시절 기록했던 내가 원하던 집이었다. 나는 아일랜드에 간 첫 일주일 동안은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해 루칸이라는 동네에서 지내며 장기적으로 머물집을 찾기시작했다.
1. 창문을 열면 쓰레기통 뷰가 펼쳐지던 내 방
첫번째 집은 아일랜드에 온 지 5일 만에 구할 수 있었는데, 나와 친구 S는 급하게 숙소를 구한 터라 이곳에 밥 먹을 식탁조차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5명의 인도인 친구들과 총 7명이 하나의 화장실을 함께 썼어야 했으며 새벽마다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고싶을 때면 졸린정신상태를 유지한채 2층까지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집주인인 인도친구 세명이 함께 계약한 지 얼마 안 됐던 이 집은 오랜 시간 동안 세입자 없이 빈집으로 있었던 탓인지 집안곳곳에 먼지가 가득했고 특히나 우리 방에 케케묵은 먼지 들은 며칠을 닦아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계속 기침을 달고 살아야 했다.
나의 로망이었던 창가 옆 침대자리는 습기가 가득 차서 축축한 이불을 덮고 잠들어야 했으며, 창문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몇 주동안 감기를 달고 살기도 했다.
웬걸, 갈수록 진상짓을 부리던 우리의 하우스메이트 친구들은 어느새부턴가 우리의 식재료와 식기도구를 말없이 쓰기 시작했고, 기껏 사온 새 수세미에 밥풀과 카레를 흥건히 묻혀놓기도 했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자기들끼리 불화가 생겨서 집을 나가네 마네 다른 집을 계약해야겠다며 집의 공동주인인 3명 중 1명은 너네도 우리를 따라 다른 집으로 가는건 어떻겠냐며 비밀스러운 제안을 하기도 했다.
도망쳐야 했다.
너무 성급했던 탓에 꿈의 집은 무슨 밥 먹을 식탁은 커녕, 7명이 사는데 빌이 거의 100유로 가까이 나오는 말 같지도 않은 집에서 내 아일랜드 생활을 낭비할 순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정말 손대지 않으려 했던 한인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집들에 연락을 걸어 뷰잉을 하기 시작했다.
2. 대단하진 않지만 바로 옆 시장에서 맛있는 과일을 싸게 사먹을 수 있던 두번째 집
내가 한인커뮤니티를 이용해서 집을 구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한국사람들과 살기보다는 외국인들과 살고 싶었고 직접 외국인들과 부딪혀보며 집을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또다시 같은 일이 되풀이될게 뻔했다. 나는 한국인 사회에 손을 뻗어야 했다.
몇 번의 뷰잉을 거쳐서 운 좋게 다시 룸메이트 S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집을 찾았다. 이곳은 시티센터에 위치한 무어스트릿 근처의 Flat형 주거로, 우리나라로 치면 아파트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한 방마다 2명이 살 수 있는 방이 3개, 총 6명이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였다.
역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사공간이나 거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방안에는 식탁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화장실은 4명이서 쓸 수 있었기에 감사함을 느꼈다.
또한 이번집은 시티센터, 도시중심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차비도 아낄 수 있어 주머니사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이 집에 살면서 일도 시작하게 됐고, 친구들을 사겨 방에 초대하기도 했다.
방음이 좋지 못한 탓에 옷장을 세게 닫으면 옆방에서 주의해 주라는 메세지가 날아오기도 했지만 약 4개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S와,
' 다른 사람과 이방에서 살면 잘 지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정말 이곳이 내가 바라왔던 더블린 생활에 맞는 집이었나?' 라는 고찰을 시작하며 또 다시 나는 거처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3.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채우고 싶던 마지막 집
나는 싱글룸을 찾아보며 시티센터에서 조금은 떨어진 곳에 집을 보러갔다.
동시에 3명의 사람들과 같이 집을 보게 되면서 내가 이방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없었지만 운 좋게도 그들은 나에게 다음 세입자로 들어오라며 연락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주저했다. 혼자만의 방이 갖고 싶었던 것은 많지만, 작은 주방과 턱없이 좁은 방.. 어두운 분위기의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나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시티센터에 살고 싶어 하던 친구와 얘기하던 중 서로 집을 바꾸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친구가 사진으로 보여준 집은. 내가 꿈에 그리던 혼자만의 방이 있는, 부엌이 넓고 예쁜 마당이 있는, 아이리쉬 할머니와 함께 살며 고작 옆방 한국인과 화장실을 셰어 하면 되는 따뜻한 분위기의 내가 꼭 바라던 집이었다.
그래서 나의 마지막 집은 이곳이 되었다.
더블린 16에 위치한 탓에 항상 버스를 타고 길을 나서야 했던, 누군가에겐 너무나 먼 거리에 위치한 집이었지만 버스창밖으로 바라볼 수 있던 그 풍경들이 나는 너무 좋았다. 일을 마치고, 일을 하러 가는 그 시간 동안 머리를 환기시킬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던 나에게 딱 필요한 거리였다.
드디어 내가 살던 집에도 밥을 먹을 수 있는 커다란 식탁이 생겼다. 벽난로가 있는 거실도 있었다. 창밖으론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져있었고 햇살 좋은 날에는 뒷마당에서 빨래를 널 수도 있었다. 할머니는 가끔 아침 9시부터 일을 나가 밤 10시에 들어오는 나를 위해 빨래를 개주시기도, 손수 먹을 것을 내주시고 맛있는 스콘이나 파블로바를 구워주시기도 했다.
이곳에선 행복한 추억이 너무나도 많아서 아일랜드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공간 중 하나이다.
할머니와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고 다시 아일랜드에 간다면 꼭 만나 뵙기로 약속했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이 집은 가족들이 없음에도 내 집 같다는 생각이 든 유일한 공간이었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기숙사, 학교 근처 원룸 그리고 아일랜드에 가서는 3곳의 집에 이사를 다니며
가족들 품을 떠나 생활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집은 그저 잠만 자면 되는 공간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직장이나 학교와 가까우면 장땡이기도 하다.
나는 각기 다른 이 세 군데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나에게 집이란 단순히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닌, 지친 하루를 보듬어줄 수 있어야 하는 혼자만의 공간이 보장되면서도 내방을 나서면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있는 따뜻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곳에 살았으면 내가 원하는 집에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신이 원하는 집은 어떤 집일까?
처음부터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다.
어찌 됐든 우리는 모험을 하러 떠난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 떠나온 만큼 다양한 형태의 집을 경험해 보는 것도 분명 재밌는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