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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Apr 16. 2024

패배해도 패배자는 되지않게

뻔뻔해지기

*사진: Pixabay, '3920357'


참패의 맛


3월이 되면 구직활동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오는 8월이면 공백기 만 1년이니, 여유있게 자리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망할 3월이 각오한 것보다 빨리 왔다. 3월이 되고서 2주를 다 넘겨서야, 2년 전 마지막으로 수정한 이력서 파일을 꺼냈다. 


종일 땀을 비질거리며 수정한 나의 이력서. 여러 해 기워입은 누더기처럼 보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척, 여기저기 첨부하고 송부했다. 그리고 하루이틀, 나아가 일이주가 지나도록 연락오는 곳이 없었다. 딱 한군데, 근무지가 경기도 군포인 회사에 적격일것 같다며 헤드헌터들 몇명으로부터 연락이 왔을 뿐이다. 아마도 근무지 때문에 사람 찾기가 어려운 듯 보였는데, 군포는 남편 회사 (우리 부부의 거주가능 지역범위)에서 너무 멀다. 


어느새 나는 마지막 연인을 추억하며, '어쩌면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었는지 몰라', 눈물지으며 여생을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실과의 차이라면, 영영 혼자 사는 것은 외로울 뿐이겠지만, 영영 소득이 없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는 점이겠지. 


그러다 오랜만에 전 회사 동료들을 만나기로 했다. 약속한 날이 가까워질수록, 핑계를 대서라도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실제로 몸살기운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그들은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할테고, 슬슬 구직활동에 나서리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들 중에서도 좀 더 나와 가까운 이들은 내가 브런치에 글도 쓰고 유튜브 영상도 만들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퇴사 후 내가 벌인 일 중 어느것 하나 ‘성공적’인 것이 없었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 물론, 성취가 전무한 나의 상황을 보면서, 잘되었다며 깨고소해 하거나 가엾어서 속상할 지경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과 나누게 될 대화를 머릿속에 그리는 것 만으로, 혀끝에서 미미하게 역한 맛이 났다. 


그 역겨운 맛은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생각이었다. 나를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 나는 루저, 그러니까 패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무엇도 추구하고 있지 않으며, 추구할 의욕도 능력도 없는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패배를 바라보는 자신감


남들은 일을 하는 시간, 내가 (집에 틀어박혀) 영위하는 활동 중 그나마 기분이 괜찮은 것들을 꼽자면 아래와 같다: 1) 고양이들 밥 주기와 화장실 청소해주기, 놀아주기, 그리고 2) 책 읽기. 1)의 경우 내가 아닌 다른 생명체들에게 이로운 행위라는 점에서 생산성을 느끼고, 2)는 당장 쓰이지 않더라도 언젠가 쓰여질 지식이나 지혜를 축적하는 투자로 느껴진다. 


그런데 어느 날, 고양이들 엄마로서의 양육활동을 대충 끝마친 후, 소파에 모로 누워 책을 읽을 준비를 마쳤는데, 책 읽기 (a.k.a 생산적 활동)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틀었다. 좋아하는 여행 유튜버들의 영상을 연달아 봤다. 원지는 우간다에 갔고, 빠니보틀은 남극에 갔다. 여행 유튜버 영상을 다 보고 나니, 유튜브가 다음 영상으로 마크 맨슨(Mark Manson, <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 저자)의 영상을 추천했다. 


<40 Harsh Truths I know at 40 but Wish I knew at 20 (40살이 되어서야 깨달은, 20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뼈아픈 40가지 진실)>이라는 영상이었는데,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 

The only way to feel better about yourself is to do things worth feeling good about. (본인을 좀 더 괜찮게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좋다고 느낄 가치가 일을 하는 것이다.) 

때마침 나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몹시 고무적인 이야기였다. 이때부터 주의를 기울여 영상을 시청했다. 나머지 서른여개의 '진실'도 모두 와닿았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감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Confidence does not come from an expectation of success, it comes from a comfort with failure.  (자신감은 성공이 예기될 때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실패 앞에서 여유로울때 나온다.)
40 Harsh Truths I Know at 40 but Wish I Knew at 20, Mark Manson (캡쳐된 사진보다는 눈이 크고 호남이심...)


여유 또는 뻔뻔


그래서 나는 태국여행을 가기로 했다. (응????) 또, 마침, 기적처럼 (뻔뻔한 이에게는 편리하게도), 참가신청이 마감되었던 치앙마이 명상워크샵이 다시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치앙마이 명상센터에서는 열대과일을 듬뿍 준다고 했었다. (과일 먹으러 태국에를????)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너댓번을 물었다. 남편은 토요일 점심, 청국장에 막걸리를 먹다 말고 내 퇴사결심을 듣게 된 예의 그 날과 비슷한 눈빛으로,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고 했다. 한숨과 체념이 섞인 그의 말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지혜로운 사랑꾼인 남편 말을 문자 그대로 접수했다. 명상 워크샵 일정 전후로 가장 싼 출/귀국 항공편을 사고, 방콕과 치앙마이의 외곽에 소재한 (a.k.a 싼) 숙소 예약까지 마치고 나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영원히 돈을 못 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서서히 개었다. 대신에 얼마 남지 않은 자유시간을 알차게 보내야겠다는 희망찬 다짐을 했다. 마포평생학습관 아현분관에서 하루에 서너권씩 책을 빌려왔다. 그 중 한두권씩만 읽었으므로 수율은 50%에 그쳤지만, 밤마다 꽤나 괜찮은 기분으로 잠에 들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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